교계 기획특집

[기획특집] 독도의 비밀

‘크리스천 언론인협회’가 ‘아고라젠’이라는 제호를 통하여 새로운 출발을 한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아가는 것이다.
역사를 새롭게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인고(忍苦)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그 자체가 ‘영속적 고난의 행군’이라 할 정도로 아픔이 많이 있다.

지난 호에 이어서 한국현대사 특집을 다룬다. 지난 기사와의 공통점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과 만행’이라는 것이다. ‘일제의 만행’으로 대한민국의 역사는 거꾸로 갔으며, ‘일제의 침탈’로 대한민국은 늙은 창녀와 같이 짓밟히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진심 어린 용서를 구하지 않는 그들은 금수보다 못한 부류에 속한다.

필자는 서울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하였다. 초등학교 시절, 산에 올라가 뛰어 놀던 추억이 아련하다. 그 산에 가면 옆으로 길게 늘어선 섬이 하나 보인다. ‘대마도’이다. 맑은 날씨가 되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보였다. 높이 올라갈수록 잘 보이는 섬을 바라보면서 친구들은 ‘역시 지구는 둥글다’는 이야기 주고받았던 추억이 있다. 부산에서 약 50Km, 일본의 후쿠오카에서는 약 150Km의 거리에 있다. 독도가 울릉도에서 육안으로 관측이 되고 대마도가 부산에서 육안으로 관측이 되지만 일본에서는 두 섬이 도무지 육안으로 관측이 되지 않는다.

‘대마도(對馬島)’는 일제의 야욕으로 ‘만주(滿洲)’와 함께 잃어버린 땅인 동시에 대한민국이 반드시 되찾아야 할 땅이다. ‘경상도 계림의 땅 대마도’는 ‘삼국시대’부터 우리의 영토였다는 사료가 충분이 있다. 조선시대에 변방을 관리하던 관리인‘경차관’이나 ‘채찰사’ 등이 파견되었던 곳이다. 세종실록을 자세히 연구하면 이러한 것이 분명해 진다. 세종원년(1419년)에는 ‘대마도 정벌’에 나서기도 했다. 일제가 임진왜란을 준비하면서 침략의 전초기지로 삼으면서부터 자신들의 영토로 여겼다. 이승만 대통령은 건국 직후인 1948년 8월에 ‘대마도 반환요구’를 하였고, 9월에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거듭된 요구에도 일본의 항의와 미국에 의해서 거부되었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의 ‘인접 해양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일본 정부는 3년에 걸친 철저한 준비로 자신의 땅이라는 논리적인 근거를 만들었지만 대한민국은 국내 사정으로 아무런 준비도 없이 1955년 한일협정을 맞이했고 다른 중대사안에 밀려 거론조차 못했다. 그리고 그 이후 일본의 독도 침탈을 위한 영유권 주장에 대응하느라 대마도의 문제는 거론조차 못하고 빼앗긴 땅으로 남게 되었다.

▲ 버지니아 주 의회가 교과서에 동해와 일본해를 병기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모습 ( 홍일승 – 버지니아 한인회 회장, 2014. 2. 6 미국)

일본의 시네마현이 조례를 통해서 독도를 자신의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부산시의회가 조례를 통하여 대마도의 영토반환 청구를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지고 가는 일을 준비해 보는 것도 대한민국의 영토를 지키는 일에 대단히 훌륭한 일이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대마도’, ‘울릉도’, ‘독도’, 이 모든 섬은 대한민국 고유의 영토이다.

1530년에 제작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餘地勝覽)>은 우리나라 전도 인본(印本)으로 간행된 조선전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첫머리 ‘팔도총도(八道總圖)’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기록되어 있어 당시 독도에 대한 인식이 확실했음을 보여주는 지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고지도의 맨 오른편 끝에는 대마도가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 한국 주민에 의해 제거된 표주. 김한용, 1953, 10, 14 한국 국회도서관 독도자료실 (박병주 기증)

우리나라 지도에 일본의 한 섬을 굳이 표시할 리가 없듯이 당시 대마도를 우리나라 영역으로 인식하고 지도를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자료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심지어 ‘대동여지도’를 보면 제주도와 대마도는 오른 발과 왼 발로 보인다. 여하튼 지난 역사들을 통하여 ‘대마도는 일본 땅’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이제는 바로 잡아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독도의 문제를 접근하고자 한다.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라도 잘 아는 것이 ‘독도(獨島)’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 섬에 대해서 설명을 하라고 하면 나설 사람이 결코 많지 않다. 왜냐하면 모르기 때문이다. 그냥 막연하게 아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아침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작은 돌 섬”, “세종실록 지리지에 등장하는 대한민국 극동에 해당하는 섬”, “신라장군 이사부가 점령한 섬”, “우리나라가 실효적인 지배를 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영토”, “일본이 의도적으로 영토 침략을 하는 섬”, “안용복의 활약으로 다시는 울릉도 등지에 왕래하지 않겠다는 일본 막부(幕府)의 약속을 받아 낸 섬”, “의용수비대의 수고로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영토가 된 곳”, “해저 수산물의 보고(寶庫)” 등이다. 모두 맞는 말이다.
어떤 이는 “일본이 국제 사법재판소에 독도의 문제를 가져가려는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실효적인 지배를 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나라가 이긴다”는 대단히 막연하고 안이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과연 국제 사법 재판소에 가면 대한민국이 이길 것인가?’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대한민국 정부에 속한 공무원들 가운데에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부산 해양대학교 최홍배 교수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말한다. “독도는 우리나라가 실효적인 지배는 하고 있지만 국제 사법재판소의 구성원이나 그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국력(國力) 등을 면밀히 검토해 본다면 대단히 안타깝게도 독도가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분명히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적인 입장, 즉 일본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면 국제 사법재판소에 독도 문제를 제기하면 한국이 이긴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국제 사법재판소에서 패소(敗訴)해도 그들에게는 잃어버릴 것이 없습니다.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사재를 털어서 경기도 고양시에‘독도홍보관’을 운영하고 있는 길종성 회장(전, 고양시의원)도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국제 사법 재판소에는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이해해 줄 사람보다는 일본의 손을 들어줄 사람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더욱이 국제 사회에서는 정의가 승리하는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관계가 더 중요합니다. 국제무대에서 한국은 일본보다 대단히 열세입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에 분명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심각할 정도로 일본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망스러울 정도로 말입니다. 대한민국이 실효적인 지배를 하고 있다는 것이 유리하긴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이길 수 없습니다. 이 영토를 지키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노력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국제사법 재판소에서 한국이 패소할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은 충격적인 주장이다. 전 국민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정부와 국민이 독도 문제에 대하여 피상적인 이해와 접근이 아니라 구체적인 이해와 더불어 국제무대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지킬 수 있는 대책이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가 본 협회지의 제호 변경 기념 특집으로 독도를 다루는 것은 지난 호에 이어서 대한민국의 건강한 역사가 바로 세워져야 한다는 인식을 바탕에 두고 있다. 누구든지 인터넷으로 독도의 지도를 검색해 볼 수 있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동해안의 해저 지형은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제주도가 있는 남해안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네이버 지도’에는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지도를 자세히 보면 해산(海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독도는 ‘독도-심흥택해산-이사부해산’으로 구성된 ‘해저산맥(海底山脈)’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울릉도에서 약 30Km, 독도에서 약 53Km 사이에 ‘안용복 해산’이 있고, 강원도 삼척시 대진항 동쪽 약 70Km, 울릉도 서쪽 약 65Km에 ‘김인우 해산’이 있으며, 독도에서 1시 방향 117Km에 ‘해오름 해산’이 있다. 그 외에도 ‘한국대지’, ‘울릉대지’, ‘울릉분지’ 등이 지도에서 발견된다. 이 외에도 울산항 동쪽 약 50Km지점에는 ‘울산 해저수로’, 제주도 우도 북쪽 약 11Km에는 ‘제주해저계곡’이 나타난다.

필자는 이 지도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서 일제의 또 다른 침략 야욕의 원인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일본이 결코 장난삼아 욕심을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남해안과 서해안에서는 볼 수 없는 지형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바로 우리의 영토인 ‘독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 해저 지형도에 관심을 갖고 살펴보면 일본제국주의의 근성이 왜 독도를 탐을 내는지 알 수 있다.
Google Earth(구글어스)를 통해서 해저 지형을 살펴보면 일본이라는 나라가 지진이 많을 수 밖에 없는 구조가 되어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동해안은 독특한 해저지형을 가지고 있음도 알 수 있다. 한국해양연구원 독도전문 연구 사업단에서 제공하는 해저 지형도를 보면 더 확실하다.
이러한 해저 지형도를 살펴보면 또 하나의 의문을 가지게 된다. 독도는 결코 작은 섬이 아니며 울릉도의 부속 섬이 아니라는 것이다. 독도와 울릉도, 제주도 가운데 막내 섬이 독도가 아니다. 가장 맏형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필자가 독도 관련 박물관을 찾았을 때에도 근무하는 직원도 이런 사실에 대하여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한다. 이것이 우리가 다루어야 할 독도의 비밀이다.

▲ 동해의 해저 지명 (자료출처, 한국해양연구원 독도전문연구센터)

독도, 그 탄생의 비밀을 밝히다.

독도는 동해의 해상 주도권을 갖기 위한 전진 기지 역할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경제적, 학술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땅이다. 이러한 독도는 노래가사에 있는 것처럼 ‘외로운 섬’으로 끝나는 섬이 결코 아니다. 독도의 생성과정을 연구하는 것은 지질학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도에 대해서 말은 많이 하지만 독도의 형성 과정이나 지질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 독도는 울릉도 동남쪽 87.4km 지점(일본열도와 유라시아대륙 사이의 후배호분지를 이루는 동해의 울릉분지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 98.6m, 둘레 2.8km의 동도와 높이 168.5m, 둘레 2.6km의 서도 외에 약 89개의 부속도서로 이루어져있다. 총면적은 0.188㎢다.
동해의 형성과 지구조(地構造, geotectonics, 지각과 같이 큰 규모의 구조 지질) 환경에 대한 중요한 지질학적 증거들을 간직한 독도는 신생기 플라이오세 초기에서 제4기 플라이스토세 중기 사이(약 460〜60만년 전)에 발생했던 해저 화산 활동의 산물이다. 수심 약 2,000m 해저에서 화산활동으로 솟아오른 직경 약 24km의 화산체의 최정상부에 해당하는 독도는 해양섬 기원인 알칼리 화산암류로 구성되어 있다. 동해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독도는 비바람과 파도에 끊임없이 침식되어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거친 지형을 갖는 화산체의 일부가 되어 해수면 위에 남아있게 된 것이다.

▲ 울릉도와 독도 주변 동해의 해저 산맥 (자료출처, 한국해양연구원 독도전문연구센터)

독도는 경제적, 군사적, 역사적, 지질학적,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곳이다. 이러한 독도는 ‘하와이나 갈라파고스 군도와 유사한 탄생설’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독도 동쪽 약 15㎞와 55㎞ 떨어진 곳에는 독도해산과 규모가 비슷한 ‘심흥택해산’과 ‘이사부해산’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울릉도에서 독도를 거쳐 이사부해산까지 동해 바다에 띠처럼 이어진 섬과 해산은 하와이나 갈라파고스 군도처럼 맨틀상승류와 열점에 의해 탄생했다는 가설이 유력하기 때문이다.
10여개의 작은 섬들이 사슬을 이루고 있는 하와이 군도는 특이하게도 북서쪽으로 갈수록 섬의 나이가 많아진다. 남동쪽 끝인 큰 섬에서는 용암을 분출하는 화산활동이 아직도 활발하다. 지난 500만 년 동안 화산활동을 하던 북서쪽의 섬들은 하나씩 불을 끄고 파도에 깎이며 물속으로 잠겨들고 있다. 큰 섬 남동쪽 바다 밑에선 활화산 하나가 언젠가 수면 위의 섬으로 떠오를 날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나라 동해도 울릉도에서 동쪽으로 갈수록 나이가 많다.

▲ 울릉도와 독도 주변 동해의 해저 산맥 (자료출처, 한국해양연구원 독도전문연구센터)

독도의 탄생에는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다. 맨틀과 핵의 경계인 약 3,000㎞ 지하에서 주변보다 뜨거운 맨틀이 지표면으로 솟아올라 지각과 만나는 곳이 열점이라고 한다. 고정된 열점이 서서히 움직이는 지각판을 달궈 화산활동이 일어나면서 ‘이사부해산’부터 ‘심흥택 해산’, ‘독도’, ‘울릉도’ 등 일련의 해산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하와이나 갈라파고스 군도도 이런 탄생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 해식동굴인 독도의 천장굴

1990년대 중반부터 독도의 형성을 연구해온 손영관 경상대 지구환경과학과 교수는 논문을 통하여 “울릉도에서 동쪽으로 갈수록 해산의 나이가 많아진다는 사실이 여러 연구에서 밝혀졌다”고 했다. 해양수산부가 2005년 수행한 ‘독도 해양생태계 조사연구’ 보고서에서도 “독도 주변의 지자기이상을 조사한 결과 독도해산이 동쪽에 있는 두 개의 해산보다 뒤에 분출했음을 알 수 있다”며 “해산의 배열 모습과 지형적 특징이 열점 개념의 화산체임을 뒷받침 한다”고 밝혔다.
한 때 독도에 화산 분화구가 있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확인 결과 그것은 분화구가 아니라 해식동굴(海蝕洞窟, Sea cave)로 밝혀졌다.
역사적·군사적 중요성과 함께 매우 중요한 지질학적 가치를 지닌 섬, 460만 년 전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독도의 비밀을 정확히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 독도는 460만 년 전 수중화산으로 탄생했다. 조용히 용암을 분출하던 초기 독도는 수면 위로 성장하면서 격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250만 년 전 화산활동을 멈췄을 때 독도는 지금보다 수십 배 큰 화산체였다. 응회암과 각력암이 미처 굳지 않은데다 단층과 주상절리를 통한 침식 때문에 독도는 빠르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현재의 독도는 화산 분화구 바깥 테두리 가운데 남서쪽 일부가 남아있는 것이다. 화구는 독도 북동쪽으로 수백m 떨어진 바다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손 교수는 “독도가 처음 울릉도 크기였다면 지난 250만 년 동안 전체의 99%가 깎여나간 셈”이라며 “지질학적으로 수명이 얼마 안 남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독도가 수 천 년 내지 수 만 년 안에 사라질 걱정은 없다”고 덧붙였다.

▲ 동해의 해저 지형 (자료출처, 한국해양연구원 독도전문연구센터)

독도화산체를 형성시킨 화산활동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현재 독도의 응회암층 내에 다량 포함되어 있는 일부 현무암질 암편들의 연대가 약 460만 년 전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독도해산의 화산활동은 적어도 플라이오세(Pliocene Epoch) 초기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플라이오세는 선신세(鮮新世)라고도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533만 2000년 전에 시작되어 약 180만 6000년 전까지 약 350만 년 간 계속되었다. 기후는 비교적 온난하지만 말기부터 한랭해져서 제4기에 빙하 시대를 맞는다.

독도는 이러한 플라이오세의 초기에 시작된 화산활동으로 탄생한 섬이라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독도의 화산암류 중 응회암층과 번갈아 나타나는 조면안산암 용암의 연대가 약 270〜60만 년 전이고 이들을 관입한 조면암맥의 연대가 230만 년 전으로 측정되었다. 이를 연대측정결과와 함께 고려한다면 이들의 지질시대는 모두 제4기(258.8만 년 전 이후)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서도 북서부에 위치한 독도 종합해양과학기지 예정지의 해저시추코어에서 채취된 조면암의 연대는약 160만 년 전으로 지금까지 독도에서 측정된 것 중 가장 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독도화산체의 화산활동이 최소한 이 시기까지 지속되었던 것을 암시한다. 참고로 ‘조면암’은 화산작용 시에 분출되어 형성되는 화성암의 한 종류로 주로 알칼리성을 나타내는 용암이 분출될 때 형성되는 비현정질의 화산암이다.
일본은 제국주의적 야망으로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지만 섬의 형성과정부터 일본 대륙붕의 연장선에 있는 ‘오키섬’과는 탄생과정부터 다른 것이다.
이종익 한국해양연구원 극지지구시스템연구부 박사는 논문을 통해 “독도와 울릉도의 화산활동이 같은 맨틀 상승류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화산활동의 시차는 맨틀상승류의 주기성과 지각 판의 이동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울릉도의 마지막 화산 활동기에 비추어 현재 열점의 위치는 울릉도 화산체 아래에 존재하거나 그 위치에서 소멸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박사는 열점 기원설의 한계로 해저 화산체에 대한 절대연령 측정 자료가 없고 판 이동을 깔끔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점을 들었다. 김창환 한국해양연구원 독도전문연구센터 박사도 “지각을 남북으로 당기는 힘에 의해 동해가 탄생했고, 이 힘은 이후 동서방향의 압축력으로 바뀌어 독도, 울릉도 등 해산을 형성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지각판이 이동하기보다는 해저지각이 갈라진 틈에 순차적으로 화산활동이 벌어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독도가 일본의 ‘오키섬’과 생성원인이 전혀 다르다는 성과를 거뒀다. 독도화산체는 일련의 열점활동 결과여서 일본 대륙붕의 연장인 ‘오키섬’과는 탄생 과정부터 다르다는 것이다.

▲ 울릉도 쪽에서 바라본 독도의 전경(앞에 보이는 섬이 서도)

동해 해저엔 지구의 역사가 살아있다. 한국해양연구소 동해지질 연구팀은 지난 1994년부터의 조사를 바탕으로 과거 12만년 동안에 동해주변에서 12번의 화산폭발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하였다. 연구에 의하면 동해의 해저에 한국영해에 속하는 울릉분지는 250만년 전 수심 2500m의 해저에서 화산활동을 시작, 수십 차례의 분출을 통해 수면으로 올라와 섬을 형성하였음이 조사되었다.
이러한 울릉분지의 퇴적층들은 과거 빙하기, 간빙기의 반복 동안 동해 전체 한류와 난류의 변동과 이에 따른 화산재 층과 퇴적물들이 잘 보존돼 있어 동해의 해양환경과 기후변화를 알아볼 수 있는 지질학적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이러한 화산활동과 기원에 대한 연구들은 과거의 활동을 통해 미래의 환경을 예측할 수 있으므로 최근 발생하고 있는 급격한 환경과 기후변화 대한 예측 및 대비에 소중한 자료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 독도의 지형(자료출처, 한국해양연구원 독도전문연구센터)

경상북도는 울릉도와 독도의 이런 지질학적 가치를 살려 유네스코 세계유산과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하기 위한 타당성 조사를 진행 중에 있다. 조사책임자인 장윤득 경북대 지질학과 교수는 “독특한 생물진화가 일어나는 울릉도와 해산의 진화과정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독도는 세계적으로도 뛰어난 보전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한 가지 더 밝혀야 할 독도의 비밀이 있다. 그것은 독도가 단순한 암초가 아니라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섬이라는 비밀이다. 국제법상 독도가 ‘도서(島嶼)’로 인정받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수원지(水源池) ‘물골’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골’은 독도에서 유사시 마실 물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수원지이다. 이러한 수원지가 있다는 것은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현 해양법(유엔해양법협약) 제121조 3항이 ‘도서’의 요건을 ‘인간거주 가능성’및 ‘독자적 경제생활 지속’의 2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규정한 때문이다.

‘물골’은 독도 영유권 주장을 굽히지 않는 일본이 독도를 ‘도서’ 아닌 ‘암초’로 국제 분쟁화하려는 시점에서 국제법상 ‘도서’ 인정과 주민 거주환경 가능성을 입증하는 차원에서 필수불가결한 수원지이다. 역사적으로도 ‘물골’은 1954년 독도의용수비대가 주변에 첫 주둔지를 닦았고, 1955년 독도경비대 식수공급 등 독도의 역사와 함께 중요한 기능을 해왔다.
물골 지하수의 기원은 상부 지표에 내린 강수다. 이 강수는 계곡과 조면안산암 내 절리를 따라서 하류로 흐르다가 라필리 응회암과 조면안산암의 경계를 따라서 물골 쪽으로 이동해 조면암 내 발달한 절리를 통해 유출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물골 지하수의 하루 유출량은 0.5~1m3로 추정되어 왔다. 그러나 2008년부터 2010년까지 5회에 걸쳐 측정한 물골 지하수의 하루 유출량은 최저 1.12m3에서 최고 7.02m3 정도다. 따라서 양적으로 상당한 양의 지하수가 생산된다고 볼 수 있다. 독도에서 민물이 하루 1천ℓ가량 나오는 생명의 젖줄로 독도의 역사와 함께 한 이러한 물골은 그 관리를 철저히 하는 것도 독도의 실효적 지배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또한 한국의 갈라파고스라 불리는 독도의 관리는 수중의 폐기물질로 인한 오염이 심각한 상태임을 알고 잘 관리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 독도연표 (자료출처,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의 역사와 일제 침략의 비밀

일본이 대한민국의 영토를 제일 먼저 침략한 곳이 독도이다.
유사 이래로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사회적·문화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도 독도는 한국영토가 분명하다. 그런데 어찌하여 일본은 ‘죽도(竹島)’라고 우기며 자기네 영토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일본의 한반도 침탈 역사에 기인한다. 즉 독도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일호의 침탈지이다. 다시 말하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선상에 닿아 있다. 한말의 어수선한 국제정세를 틈타 무인도인 독도에 해군병력을 배치하고 1905년 러일전쟁을 치르면서 독도를 ‘다케시마’로 일본영토에 편입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이보다 먼저 1900년(고종37년)에 이미 강원도 울진현에 속한 울릉도와 석도(石島 독도)를 묶어 독립된 군으로 전 세계에 선포하였다(대한제국칙령 41호)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 후로도 일본은 독도를 자기 섬이라 주장하며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망동을 해 왔으며 지금 현재에도 진행 중에 있다. 개화기 잠시 힘이 없어 자주국방을 소홀히 하였고 국론이 분열되어 근대화에 늦었으며 국제정세에 밝지 못하여 외세를 불러들였고 일본에게 빌미를 준 점을 깊이 반성하여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 외교 전략이 실효적 지배만을 강조하여 조용한 외교, ‘무 대응이 상책’이라는 외교 전략은 우리에게 유익할 것이 없다.
이러다 보니 일본은 진실이 아닌 사실을 진실인양 왜곡하여 자국민에게 교육하고 적반하장 격으로 국제사회에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홍보하며 분쟁지역화 하여 국제사법재판소에 이끌어 내어 이슈화하고 공론화하여 힘의 외교로 밀어붙이려는 간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독도는 분쟁지역이 아니며 영토에 대한 논쟁은 있어도 분쟁은 원천적으로 없다. 그러나 국제간 정치외교는 힘의 산물이다. 힘이 강하면 많은 것을 가지며 힘이 약하면 성과를 내지 못하는 현실이다.

독도는 신라 지증왕 때 이사부 장군이 징벌한 이래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의 실질적 지배하에 있었던 역사적 기록이 현존하고 있으며 특히 뜨거운애국심과 큰 배포를 가진 안용복과 독도의용수비대장 홍순칠과 예하 대원들, 독도 거주자 최종덕 씨 등 뜻있는 분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피와 땀으로 지켜낸 한국 고유의 영토이다. 최근 잇따라 발견되고 있는 한국과 일본, 서양의 고지도에 독도는 분명히 한국 땅으로 기록되어 있다.
2차 대전 후 일본의 침탈지 반환을 선언한 카이로 포츠담 선언에서도 독도는 한국 땅이며, 2차 대전 종전 시 일본주둔 미군 사령관 맥아더의 맥아더 라인에도 독도는 분명 한국 땅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일본 기관이 제작하여 배부하고 일본 내에서 발견되고 있는 고지도 속에서도 독도는 분명히 한국 땅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그러한 사실을 일본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일본의 고유영토를 강점하고 있다고 허위 사실을 주장하며 왜곡된 역사교육을 계속하는 일본의 속셈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독도와 관련된 일을 하는 분들은 일본의 속셈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것이다. 일본이 손해 볼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독도의 생성과정을 살피면서 해저 지형을 보았는데 대단한 지형이다. 일본이 욕심을 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독도를 소유하는 것은 한반도의 영토와 유사한 해저 영토가 확보되는 것이기에 욕심을 내는 것이다. 또한 러일전쟁 이후로 독도는 동해상의 군사거점으로 대단히 중요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해양지하 자원의 풍성함과 더불어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지점이기 때문에 수산업기지로서의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보배로운 섬을 일본이 쉽게 포기 할 까닭이 없다.

우리는 독도의 역사를 정확히 정리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독도 관련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독도에 대한 열정을 가진 사람은 많이 있으나 효율적인 대안 세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함께 협력이 되지 않는다. 기득권을 주장하는 마음으로 영토수호를 한다는 빌미를 주장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물론 이 일을 위해서 수고한 개인들이나 단체들이 많음도 사실이다. 그러한 수고에 대하여 적절한 보상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부에서 모든 것을 감싸 안아주는 일련의 조치를 해야 할 필요성도 분명히 있었다.

▲ 삼국사기 (三國史記, 사권, 신라본기 4, 지증마립간 13년 6월조, 자료출처, 동북아역사재단)

독도는 서기 512년부터 우리의 영토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열전에 의하면 독도는 서기 512년(신라 지증왕 13년)에 우산국(于山國)이 신라에 병합될 때부터 한국의 고유 영토가 되었다. 우산국은 동해 가운데 울릉도와 독도(우산도) 두 섬으로 구성된 고대 해상 소왕국이었다. 우산국이 울릉도와 독도(우산도)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은 ‘세종실록지리지’(1432년 편찬), ‘동국여지승람’(1481), ‘신증동국여지승람’(1531), ‘만기요람 군정편’(1808), 그 밖에 각종 고문헌과 지도에도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세기 후반까지 독도의 이름이 ‘우산도’였다는 사실도 독도(우산도)가 ‘우산국’의 영토였음을 분명하게 증명하는 것이다.

고대 울릉도와 이에 부속된 독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은 「三國史記」에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우산국(于山國) 관련 기사와 고고학 자료를 통해서이다.
울릉도의 옛 주인인 우산국인의 계통 및 국가 발전단계, 문화수준의 정도는 구체적으로 가늠할 수는 없다. 지리적인 요건으로 육지의 제 국가와의 교류가 원활하진 못하였지만 우산국왕 우해가 대마도를 공격하여 대마도주의 딸을 데려 왔다는 전설과, 신라군의 우산국 정벌 시 힘만을 앞세운 공격이 아닌 교묘한 계략을 구상했어야 했다는 것을 볼 때 그들은 오늘날 울릉도, 독도등지를 포함한 도서지역과 그를 둘러싼 바다 및 동해안 일대를 기반으로 한 강력한 해상세력의 국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산국은 바다를 주된 생활공간으로 하고, 비옥한 토질과 풍부한 수량 및 진귀한 나무, 풍부한 해산물의 다량산출로 풍족한 생활을 영유하는 반어반농인(半漁半農人)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신라 지증왕 13년 (512년) 하슬라주(溟州-강릉지역)의 군주인 이사부(異斯夫)에 의해 복속이 된다.

지증왕 13년 6월 우산국이 귀복해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기로 했다. 우산국은 명주 동쪽바다의 섬에 있는데 혹 울릉도(鬱陵島)라 이름하기도 한다. 땅이 사방 백리인데 험함을 믿어 복종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 군주가 되었는데, 말하기를 “우산국 사람들은 어리석고 사나워서 힘으로 굴복시키기 힘들므로 계책을 써야 한다”하였다. 이에 나무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으로 갔다. 그 나라의 해안에 도착한 후 신라군은

우산국인들에게 속여 말하기를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들을 풀어서 모두 밟아 죽이게 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우산국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곧 항복하였다.

우산국인들은 해마다 신라에 토산물을 바치고, 신라인의 왕래가 편리하게 되면서 이를 계기로 문화의 교류로 인해 신라의 문화가 우산국 내로 활발히 유입되게 된다. 울릉도(우산국)가 일찍부터 본토의 신라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은 문헌뿐 아니라 고분출토유물로 추정되는 동관편 즉 위세품의 양식과 고분군의 축조 및 공반 출토되는 신라토기 등 고고학자료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삼국사기의 기사를 통해 적어도 서기 5C 에는 울릉도에 해상세력을 주축으로 집단거주를 하였고, 또 신라가 군사를 보내 그들을 정벌하여 본토와의 정식내왕이 6C 초부터는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산국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후 본토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들을 통치하였는지에 관한 직접적 증거자료는 없으나 주현의 설치를 통한 직접적 통치이거나, 토착세력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간접통치일 수 있다. 신라 후대에 와서 지방에 대한 통제는 무너지고, 각 지방의 호족세력의 등장과 함께 우산국 역시 반독립 상태에 놓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에도 우산국은 통일신라 및 고려에 이르기까지 신라와의 교역을 바탕으로 선진문물을 도입하고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함으로 수준 높은 해양문화를 창조하였을 것이다.

▲ 울릉도에서 출토된 신라시대의 유물 좌측부터 목걸이, 금동(金銅)제품,항아리(자료출처, 울릉도박물관)

고려사에 나타난 울릉도와 독

고려사를 연구해 보면 930년 8월 15일에는 토산물을 바친 것이 나오며, 현종 9년(1018년) 11월 병인(丙寅)에 두만강 하류 동북지방(지금의 연해주와 북간도)에 살던 동북 여진(東北女眞)이 울릉도를 침략하고 노략질하여 농업이 황폐화되었으므로, 조정에서 이원구(李元龜)를 파견하여 농기구 및 식량과 종자를 하사해 주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1019년 7월 24일에는 지난해에 동북 여진족에게 끌려갔다가 도망쳐 온 사람들을 다시 우산국으로 돌아가도록 명령했다고 전하고 있다. 역시 고려의 계속적인 울릉도 및 부속도서의 통치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사료이다. 그러나 울릉도로 돌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현종 13년까지 귀환하지 않고 남아있던 사람들을 예주(禮州, 현재의 강릉)에 거주하게 하고 관청에서 양식을 조달해 주면서 영구히 살 수 있도록 하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에 나타난 울진현과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기록 (자료출처, 동북아역사재단)

조선시대의 역사에 나타난 울릉도와 독도

세종의 명으로 맹사성, 권진, 윤회 등이 완성한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를 수정, 보완하여 1454년(단종 2) 『세종실록』을 편찬할 때 부록으로 편입한 것이 바로 이 세종실록 지리지이다. 모두 8책으로 전국 328개의 군현(郡縣)에 관한 인문 지리적 내용을 담고 있으며, 『세종실록』 권153의 강원도 울진현조에 우산도(독도)에 대한 내용이나온다. 우산도(독도)와 무릉도(울릉도)가 별개의 섬이고 울릉도에서 날씨가 맑으면 보이는 유일한 섬이 독도라는 것을 감안할 때 우산도가 곧 독도이며 강원도 울진현에 속한 조선의 영토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울릉도와 독도의 기록을 남기면서 신라와 고려사에 나타난 이야기를 모두 기록하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2섬이 현의 정동(正東) 해중(海中)에 있다. [2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에 우산국(于山國), 또는 울릉도(鬱陵島)라 하였는데, 지방(地方)이 1백 리이며, 〈사람들이 지세가〉 험함을 믿고 복종하지 아니하므로, 지증왕(智證王) 12년에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軍主)가 되어 이르기를, “우산국 사람들은 어리석고 사나와서 위엄으로는 복종시키기 어려우니, 가히 계교로써 하리라” 하고는, 나무로써 사나운 짐승을 많이 만들어서 여러 전선(戰船)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에 가서 속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사나운〉 짐승을 놓아서 〈너희들을〉 잡아먹게 하리라” 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와서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13년에, 그 섬 사람들이 백길토두(白吉土豆)로 하여금 방물(方物)을 헌납하게 하였다. ▲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에 나타난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국역 (자료출처, 동북아역사재단)

▲ 1531년 「신증동국여지승람」 사십오권, 울진현 우산도 울릉도조 (자료출처, 동북아역사재단)

1531년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통해서도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때까지 일본은 울릉도나 우산도(于山島)에 대한 아무런 인식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신라시대부터 지속적으로 우리의 영토로 인식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1667년 은주시청합기 제1권 (자료출처, 동북아역사재단)

일본기록에서 ‘’松島(독도)’에 관한 기록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료는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 1667년)이다. 1667년 일본 운주지방의 번사였던 사이토 호센(齊藤豊仙)이 편찬한 것이다. 일본의 온슈(隱州)를 관찰하고 들은 내용을 기록한 보고서로서, 바다를 표류하던 중에 만난 울릉도(竹島)와 독도(松島)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은주시청합기’에는 오키섬을 구성하는 4개의 큰 섬과 주위의 5개의 작은 섬들을 그린 그림이 포함되어 있는데 울릉도와 독도가 오키섬에 속하는섬이라면 당연히 이 그림에 포함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일본의 주장대로 ‘은주시청합기’에서 독도가 일본의 서북경계로 봤다면 ‘은주시청합기’가 발행된 1667년 이전과 이후에 제작된 일본의 공식지도에 독도가 일본 영토로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독도가 일본 땅으로 표시된 일본의 공식고지도는 전혀 없다. 오히려 ‘은주시청합기’가 발행된 시기에 일본은 울릉도가 조선 땅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 증거를 1625년 울릉도 조업 허가에서 찾을 수 있다.

1625년 ‘에도막부’는 오오야 · 무라까와가 문에게 울릉도 연해에 들어가 조업해도 좋다는 ‘죽도도해면허’를 호키슈를 통해 내주었다. 당시 ‘에도(江戶)막부’는 울릉도(竹島)를 조선령으로 보았다. 특히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구끼 등이 제작한 ‘조선국지리도’에는 울릉도가 ‘우산도’와 함께 조선의 영토로 기록되어 있어 일본 막부(幕府)의 울릉도에 대한 견해는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것이었음이 입증된다. 또, 17세기 초반 울릉도에 잠입해 불법벌채를 했던 이소다케 야자에몬(磯竹弥左衛門) 사건을 살펴보건대, 에도막부가 울릉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 울릉도와 독도의 영토 소유권에 관하여 질의하는 기록들의 원본이미지들.
▲ 위 기록은 일본이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의 일부라고 보지 않았음이 명확하게 나타난다.
이들 기록은 일본 외무성 그리고 시마네현 로비스트들의 약 17 세기 섬소유에 관한 잘못된 주장을 효과적으로 잠재운다.

이 문서들은 독도에 대한 역사적 소유권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1693년 첫 번째 안용복 사건이 개입된 울릉도 분쟁 이후에, 일본은 다케시마(울릉도), 그리고 마츠시마(Matsushima -松島, 독도)의 영토 소유권에 관해 조선과 교류를 시작한다. 이 페이지 문서들은 일본인 기록으로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막부의 입장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는 다케시마 그리고 마츠시마(Matsushima -松島)에 대한 명확하게 의심되는 부분, 그리고 1695년 막부와 인바슈 간의 대답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들 문서들에서 우리는 막부가 울릉도와 독도는 모두 일본의 영토 일부가 아니라, 조선 영토라고 간주한다고 결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쇼군이 인바슈에게 질문한 내용(1695년)을 요약하여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1. “…다케시마(울릉도)가 언제부터 이나바주(因幡)와 호키국(伯耆)의 일부로 관할되었는가? 1632년 전인가 후인가? 언제 선조들이 땅을 받았는가?”
2. “…다케시마의 크기는 얼마인가? 사람들은 살고 있는가?”
3. “…다케시마에 해산물을 채취하러 떠나는 날은 언제인가? 그들은 매년 가는가 또는 가끔 가는가? 무얼 사냥하는가? 거기 가는 배는 많은가?”
4. “…3-4년 전, 한국인들이 거기서 사냥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중 두 사람은 볼모로 잡았다. 한국 사람들은 그 전에도 거기에 갔었는가? 아니면 그들은 2년간 밖에 오지 않았는가.?”
5. “…그들은 지난 2년 동안 거기에 있었는가.?”
6. “…작년에 간적은 언제인가? 얼마나 많은 배들이 거기에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사람들이 거기에 있는가?”
7. “…두 지역 관할 안에 다케시마 외의 다른 섬도 있는가? 이들 두 지역 사람들은 그들의 어업을 하고 섬에 모여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막부의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인바슈의 회신 내용이 문서로 남아 있다.

1. “…다케시마는 이나바(因幡)국 또는 호키(伯耆)에 속하지 않는다. 松平新太(池田光政)가 호키의 영주였을 때(1617~1632) a,b,c, (일본인)가 바다를 건너 어업을 하였다. 나도 역시 듣기로는 정부 관리들(막부)에 의해서 공식문서 발행을 통하여 허가된 것으로 들었다. 나도 역시 이들의 활동이 그 시대에 행해졌다고 들었지만 확인할 수는 없다….”
2. “…섬은 둘레가 약 8 또는 9리(36km) 그리고 ”아무도 살지 않는다…”
3. “…사냥과 채취기는 2월 내지 3월에 그리고 요나고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매년 가는데, 전복을 따고 그리고 물개를 잡는다. 그들은 크고 작은 두 배를 이용한다…”
4. “…4 년 전, 조선 사람들 섬에 와서 우리 어부들을 만났는데 이것은 그때 기록된 것이다. 다음해, 조선 사람들 계속 와서 우리 어부들과 대립되어 두 사람을 요나고로 데리고 왔으며 그것이 기록되었으며 그들은 나가사키로 보내졌다….
5. “…다음해 바람이 거세어서 그 섬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해에, 도해가 다시 행해졌으나 많은 외국인들이 보여서 따라서 그들은 관심을 두지 않고 그 섬을 떠났다. 돌아오는 길에 마츠시마(Matsushima -松島)에서 전복을 잡았다…”
6. “…4 년 전, 조선 사람들이 왔는데 그들은 11척의 배를 타고 왔다. 6척은 거센 바람을 맞았고 그리고 나머지 5척의 배는 섬(다케시마)에 머물렀는데 53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다음해 42명의 사람들이 3척의 배로 왔다. 이 해에, 많은 배들과 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관심이 거의 없어서 나머지는 잘 아는바가 없다…”
7. “…다케시마(울릉도) 그리고 마츠시마(Matsushima -松島)(독도) 그 외에 두 현에 속하는 다른 섬은 없다…”

▲ 1696년 안용복에게 전달한 독도출어금지문서

1695년 12월 24일 돗토리 현 기록,증거에 입각한 결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호키’국(伯耆) 그리고 ‘이나바’국(因幡)은 모두 다케시마(울릉도) 그리고 마츠시마(松島,독도)를 일본영토라고 인식하지 않았고, 막부도 그렇게 인식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서 역시 마츠시마(Matsushima -松島, 독도)도 영토분쟁에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 논의는 로주 아베, 분고노-카미가 1696년 울릉도 문제 언급으로 관리를 처벌하기 직전에 일어난 일이며 그리고 그것은 막부의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고 믿어진다. 공식 기록의 언급은 “…처음부터 섬은 조선으로부터 힘으로 취한 것도 아니며 따라서 조선으로 돌려준다는 것도 말이 안된다….” 그리고 이것은 다케시마가 고대로부터 조선의 고유영토라는 것이다.
역사적 근거로서 막부가 의식적으로 다케시마(울릉도)와 마츠시마(Matsushima-松島, 독도)를 구별하였다는 기록은 없으며, 따라서 독도는 울릉도에 부속된 섬이라고 인식하였을 뿐이다. 이것은 당시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생각이었음이 틀림없다.

1696년에 ‘에도막부’는 울릉도 도해 금지령을 내리게 된다. 이 일에는 안용복이 일본에 2회 방문하여 항의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처럼 일본은 1620년 이후에 울릉도와 독도에 대하여 인식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며 그 이전에 분명히 대한민국의 영토였다는 역사적인 기록과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만기요람』은 서영보, 심상규 등이 왕명을 받들어 국왕이 정사에 참고할 수 있도록 재정과 군정에 관한 내용을 모아 1808년(순조 8)에 편찬한 것이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에 이르는 조선왕조의 재정과 군정에 관한 내용이 ‘재용편(財用篇)」 6권과 「군정편(軍政篇)」 5권에 실려 있다. 이 책에는 우산국에 울릉도와 우산도가 모두 포함되어 있고, 우산도가 당시 일본인들이 말하는 송도(松島), 즉 독도임을 증명하고 있다.

▲ 1808년 만기요람(자료출처, 동북아역사재단)
▲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자료출처, 동북아역사재단)

 

 

 

 

 

 

 

 

또한 1881년 울릉도를 조사하러 갔던 울릉도 수토관이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불법으로 입도하여 나무를 베고 배를 만든다고 보고했다. 1882년 4월 고종은 이규원을 울릉도 검찰사로 임명하고 울릉도 사정을 파악하도록 지시하였다. 이규원은 100명이 넘는 대규모 조사단을 이끌고 울릉도에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어딘지, 일본인들의 불법 입도가 어떠한 상황인지를 조사하기 시작하였고 그 검찰 과정을 『울릉도 검찰일기』 에 남겼다. 검찰사 이규원의 보고는 울릉도를 다시 개척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규원의 보고를 받은 고종은 울릉도 개척을 명했다. 그리고 1883년부터는 주민들이 정식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한편 1876년 일본 외무성은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를 통하여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령이 된 사정을 기록한 문서를 제출하였다. 일본의 메이지 정부는 1869년에 외무성 관료 3명을 조선에 보내어 조선의 사정을 염탐하도록 지시했다. 이 외무성 관료들의 조사를 바탕으로 1870년에 일본 외무성의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이 문서에서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가 된 사정을 밝히고 있다.
“송도(독도)는 죽도(울릉도) 옆에 있는 섬입니다. 송도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기재된 기록이 없지만 죽도에 관해서는 원록 연간(元祿年間)에 주고받은 서한에 기록이 있습니다. 원록 연간 이후 한동안 조선이 거류하는 사람을 파견하였으나 이제는 이전처럼 무인도가 되어 있습니다. 대나무나 대나무보다 두꺼운 갈대가 자라고 인삼도 저절로 나며 어획도 어느 정도 된다고 들었습니다. 이상은 조선의 사정을 현지 정찰한 바, 대략적인 내용은 서면에 있는 그대로이므로 우선 돌아가 사안별로 조사한 서류, 그림 도면 등을 첨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 1877년 일본 최고 행정기관인 태정관 지령 (자료출처, 동북아역사재단)

일본 메이지(明治) 정부의 최고 행정기관인 태정관(太政官)은 1877년에 내무성에 지령을 하달한다. 이것은 일본이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인정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증거이다. 1876년 10월 시마네 현이 관내의 지적(地籍) 조사와 지도 편찬 작업을 하던 중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를 시마네 현에 포함시켜야 하는지 내무성에 의견을 물었다. 1877년 3월 내무성은 “이 문제는 17세기에 끝난 문제이고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과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내무성은 이 문제가 일본의 영역과 관련된 중요한 사안이라고 판단하고 당시 최고 행정기관인 태정관에 최종 결정을 넘겼다. 1877년 3월 29일 태정관은 이 질의서를 검토한 후 17세기 말 도쿠가와 막부가 내린 울릉도 도해 금지 조치 등을 근거로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과 관계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이라는 지령을 내무성에 하달하였다.

▲ 태정관 지령 부속지도 (자료출처, 동북아역사재단)

이 지령의 부록으로 붙어 있는 “울릉도 외 일도(一島)”에 일도(一島)가 독도라는 것은 위 공문서의 첨부지도인 「기죽도약도」와 부속서류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일본은 태정관의 결정으로 명백히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의 영역에서 제외하고 있다. 이는 17세기 한일간 울릉도 논쟁의 결과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내무성의 품의서나, 태정관 지령은 울릉도와 독도를 한 세트로 인식하고 있는데, 이는 17세기 당시 에도막부가 도해금지한 지역에는 울릉도만이 아니라 독도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1877년 ‘태정관 지령문’에 의하면 ‘울릉도 외 1도는 본방(本邦, 일본)과 관계가 없는 것으로 명심하라’고 나와 있다. 그런데 일본은 ‘외 1도’가 독도가 아니라고 우겼던 것이다. 그러나 ‘외 1도’에 대한 설명이 ‘태정관 지령문’에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일본은 숨게 설명하고 있지만 일본은 숨기고 있는 것이다.

부산에 있는 국립해양박물관에는 에도막부 시절에 울릉도와 독도에 어업을 금지했던 중요한 역사적인 사료가 보관 전시되고 있다.

▲ 1837년, 울릉도와 독도 항해를 금지시킨 ‘죽도제찰’(자료제공, 국립해양박물관)

이 팻말은 일본이 한국으로 팔려갈 것을 우려하던 일본 에도(江戶)시대의 나무 팻말이 극적으로 한국으로 넘어왔다. 나무팻말에는 1837년 독도와 울릉도가 한국 땅이니 일본인의 항해를 금지시킨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팻말은 일본 에도 바쿠후(幕府)가 독도와 울릉도 주변에서 조업을 한 자국 어민 2명을 해금령(海禁令) 위반으로 처형한 이듬해에 만든 것이다. 1837년 2월, 에도 바쿠후의 명령을 받아 다카다번(高田藩)이 니가타현 지역 해안에 게시한 것으로 가로 72㎝, 세로 33㎝ 크기다. 팻말 위쪽에는 두 개의 고리가 달려 있어 게시판에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팻말에는 “죽도(울릉도의 일본 이름)는 겐로쿠(元祿·1688~1704년)시대부터 도해(渡海) 정지를 명령한 곳이므로 다른 나라 땅에 항해하는 것을 엄중히 금지한다”며 “죽도의 오른쪽 섬도 항해해선 안 된다”로 기록돼 있다. 오른쪽 섬이란 독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상태 국제문화대학원대학 석좌교수는 “이 팻말은 죽도(울릉도)의 오른쪽 섬(독도)까지 항해금지를 내린 것으로 기록돼 일본이 독도를 한국 땅이라고 스스로 인정한 중요한 사료”라고 했다. 바로 이 ‘오른쪽 섬’이란 구절 때문에 일본이 팻말의 반출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팻말 발견으로 일본이 독도를 자국 땅에서 배제한 것이 명확해진 것이다. 팻말은 이어 “해상에서 다른 나라 배와 만나지 않도록 하고 될 수 있는 한 먼 바다에 나오지 않도록 분부한다”고 되어 있다.
당시 일본 기록을 보면 “에도 막부의 도해 금지 통지는 팻말로 해서 게시판에 걸어두고 고다이칸(치안담당자)은 방방곡곡에 이를 알려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이에 따라 이런 울릉도·독도 도해금지령 팻말은 일본 해안 곳곳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기록에 나오는 오른쪽 섬에 대하여 더 명확한 근거가 있다. 도해 금지령을 어겨 1836년 사형에 처해진 ‘하치에몬’의 공술 기록에서 분명해진다. 그가 남긴 지도가 있다.

▲ 1836년 사형에 처해진 ‘하치에몬’의 판결문에 나오는 지도

위의 지도는 ‘하치에몬’이 울릉도 도해 당시 직접 그린 지도이며 한반도와 울릉도 독도는 붉은 색이고 오키섬과 일본 열도는 하얀색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 일본인들의 영토의식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당시 일본인들에게는 울릉도와 독도는 무단으로 도해하면 사형을 당할 수 있는 금단의 땅이었다.
세종대학교 일어일문학과 ‘호사카 유지’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에몬 자신이 울릉도 독도가 조선의 것이라고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선과 울릉도, 독도를 같은 빨간 색으로 그렸고요. 아래쪽에 있는 시네마현(일본)은 완전히 백색입니다.”
이에 대하여 ‘나이토 세이츄’ 시마네 대학 명예교수는 더 분명히 밝히고 있다. “1696년 이후 일본 지도, 막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지도에서는 울릉도, 독도는 모두 일본령이 아니라는 행태로 색칠이 되어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왜 울릉도를 죽도(竹島)라고 부르고 독도를 송도(松島)라고 불렀는가?’에 대하여 호사카 유지 교수는 “울릉도에 대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죽도(竹島) 즉 다케시마라고 불렀던 것이고요. 독도에 나무가 없지만 송도(松島),라고 부른 것은 일본에서는 ‘다케’(竹,) 즉 대나무에 대해서는 항상 짝으로 소나무를 말합니다. 그래서 독도를 송도(松島) 즉 ‘마츠시마’라고 불렀던 것입니다”라고 한다.

▲ 1890년 10월 25일 결정. 대한제국 관보 제1716호, 칙령 제41호 (자료출처, 동북아역사재단)

대한제국 정부는 1900년(고종 37) 10월 25일자로 전문 6개조의 「울릉도(鬱陵島)를 울도(鬱島)로 개칭(改稱)하고 도감(島監)을 군수(郡守)로 개정(改正)한 건」을 결정하였다. 이 내용은 1900년 10월 27일자 대한제국 관보를 통해 공포되었다. 이 칙령 제2조에는 “군청의 위치는 태하동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전도(鬱陵全島)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를 관할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죽도는 울릉도 본섬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 있는 섬으로 서울릉도 주민들은 이 섬을 댓섬(대나무섬)이라고도 부르는데, 죽도(竹島)는 댓섬의 뜻을 취하여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석도(石島)는 당시 독도를 가리키는 돌섬의 사투리인 독섬의 뜻을 취하여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대한제국 정부는 칙령 제41호의 관보 게재를 통해 독도가 울도군수의 관할구역에 포함되어 있는 우리의 영토임을 국내외적으로 알렸다.

이에 일본은 국제적으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추지 않은 자국 내의 회람 문서에 해당하는 ‘시네마현 고시 제40호’(1905년)를 통하여 독도를 시네마현 소관의 영토로 불법 편입을 시켰다. 그러나 이 고시에는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시마네현은 1905년 당시에는 공시하는 기관지가 없었고 고시 자체가 공시라는 주장을 펼 것으로 보이지만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시마네현은 명치19년(1887년)부터 명치21년까지는 공보를 썼고 현보는 대정5년(1916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1905년 당시엔 법령제정을 공포하는 수단이 없었다. 설령 공포한 문서가 있었다 하더라도 명치38년 공문서는 모두 소실되었다.

일본이 독도를 불법적으로 편입한 후 1년이 지난 1906년 3월 시마네 현 관리들이 울릉도에 와서 울도군수 심흥택에게 독도의 일본 영토 편입 사실을 알렸고, 이에 놀란 심흥택은 3월 29일 강원도 관찰사 이명래를 거쳐 참정대신 박제순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울도군수 심흥택 보고서안에 본 군 소속 독도가 외양(外洋) 백여 리 밖에 있는데, 이달 초 4일 9시 경에 윤선(輪船) 1척이 군내 도동포에 와서 정박하였고, 일본 관원 일행이 관사에 왔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독도가 이번에 일본의 영지가 되었기에 시찰차 나온 것이다 하는 바, 그 일행은 일본 시마네 현 오키도사 히가시 분스케(東文輔)와 사무관 진자이 요시타로(神西由太郞), 세무감독국장 요시다 헤고(吉田平吾), (경찰)분서장 가게야먀 이와하치로(影山巖八郞)와 순사 1명, (의회)의원 1명, 의사, 기술자 각 1명, 그 외 수행인원 10여 명이고, 먼저 가구, 인구, 토지와 생산의 많고 적음을 물어보고, 다음으로 인원과 경비 등 제반 사무를 조사하여 갔으므로, 이에 보고하오니 살펴주시기를 엎드려 바라며 이에 보고하오니 살펴주시기를 엎드려 바라옵니다.

광무 10년(1906), 4월 29일
강원도 관찰사 서리 춘천군수 이명래

의정부 참정대신 합하
▲ 강원도관찰사서리(江原道觀察使署理) 춘천 군수 이명래(李明來) 호외보고서 내용
올라온 보고는 다 읽었고, 독도 영지 운운하는 설은 전혀 그 근거가 없으니, 섬의 형편과 일본인의 동향을 다시 조사해 보고하라.
▲ 참정대신 박제순(朴齊純) 지령 제3호(자료출처, 동북아역사재단)

▲ 강원도관찰사서리(江原道觀察使署理) 춘천 군수 이명래(李明來) 호외보고서 및 광무10년(1906) 4월 29일 참정대신 박제순(朴齊純) 지령 제3호 (자료출처, 동북아역사재단)

고지도에 나타난 우리의 영토인 독도

「팔도총도」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첫머리에 수록된 조선전도로서 현존하는 우리나라 고지도 중 독도가 그려진 가장 오래된 지도이다. 「팔도총도」에는 국가의 기밀을 지키기 위해 누구나 알 수 있는 주요 산과 하천, 섬, 도(道)와 바다의 명칭 등 간단한 정보만을 수록하였다. 독도는 우산도(于山島)로 표기하고, 동해 지명은 바다가 아닌 동해신(東海神)을 제사하는 강원도 양양에 ‘ 동해(東海)’라고 표기하였다. 이 지도는 본래 1481년에 만들어진 것인데 동해상에 울릉도와 우산도 두 개의 섬이 그려져 있다. 비록 위치는 정확하지 않지만 ‘팔도총도’에 두 개의 섬이 그려져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이는 조선 정부가 동해에 울릉도와 우산도, 두 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소재 팔도총도 (자료출처, 동북아역사재단)

정상기(鄭尙驥, 1678~1752년)의 「동국지도」를 영조 시대에(18세기) 필사자가 일부 변형시킨 대형의 조선전도로 만주와 청나라의 동쪽 해안 및 일본을 함께 그렸다. 「동국대지도」의 조선은 거리와 방향의 정확성을 기한 반면 일본은 조선 전기 계통의 지도에 나타나는 대로 동남쪽에 아주 작게 그렸다. 동해 해역에 울릉도를 나타내고, 우측에는 우산(독도)을 표기하였다.

▲ 해좌전도 (자료출처, 동북아역사재단)
▲ 프랑스 ‘당빌’의 ‘조선왕국전도’(자료출처, 국토지리정보원)

「아국총도(我國總圖)」는 18세기 후반의 『여지도』에 수록된 것으로 작자는 미상이다. 「아국총도」는 오행사상에 따라 군현의 명칭을 동쪽(강원도)은 푸른색, 서쪽(황해도)은 흰색, 남쪽(전라도, 경상도)은 붉은색, 북쪽(함경도)은 검은색, 그리고 중앙(경기도, 충청도)은 황색 등 5방위 색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산과 하천을 정교하게 표현하고, 바다에는 작은 섬의 명칭까지 적었다. 바다는 그 위치에 따라 동해(東海), 서해(西海), 남해(南海)로 표기하였고, 독도를 우산(于山)으로 표기하였다.

「해좌전도(海左全圖)」는 19세기 중엽에 제작된 목판본 조선전도로서 작자는 미상이다. 「해좌전도」는 지도 여백에 지리, 역사 등 인문지리적 내용이 풍부하게 기술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동해에는 울릉도와 그 동쪽에 독도(우산도)를 표현하고 주기를 달았다. 여기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 우산국의 역사, 즉 이곳이 본래 우산국으로 신라의 이사부가 항복을 시켰다는 내용 등을 개괄적으로 기술하였다.

울릉도와 함께 독도(우산도)가 조선 왕조의 영토라는 사실은 일본 등에는 물론이고 서양에도 잘 알려졌다. 서기 1737년에 프랑스의 유명한 지리학자 당빌이 그린 [조선왕국전도]에도 독도(우산도)가 조선왕국의 영토로 그려져 있다. 울릉도와 독도가 동해안에 매우 근접하게 그려져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지도처럼 우산도(독도)가 울릉도보다 안쪽에 그려져 있는 것은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더 강조해 주는 것이다.

일본 실학자 하야시 시헤이가 1785년에 편찬한 ‘삼국접양지도’는 나라별로 색깔을 달리하여 조선은 황색으로, 일본은 녹색으로 표시했는데, 동해 가운데 울릉도와 독도(우산도)를 조선 색깔인 황색으로 정확하게 칠했을 뿐 아니라 그 옆에 ‘조선의 것’이라 써서 울릉도와 독도(우산도)가 조선 영토임을 명확하게 표시하였다.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의 영토라는 지도는 일일이 제시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많이 있다. 고문헌이나 고지도를 살펴보면 일본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이처럼 무엇을 보아도 울릉도와 독도는 분명히 우리의 영토임에 분명하다. 더욱이 세계 제2차 대전 이후에 카이로선언(1943년)을 통하여 “일본이 타국으로부터 약탈한 영토를 반환할 것”을 선포하였고, 포츠담선언(1945년)은 “카이로 선언을 이행할 것”을 재확인하였으며, 1946년 연합국 최고 사령관 각서 제677호를 통하여 ‘독도를 일본에서 행정상 분리’를 시켰다. 이것이 팩트(Fact)를 갖춘 역사이다.

일본이 자신만만하게 국제사법 재판소에 갈 것을 주장하는 것은 가장 최근의 고시가 자신들의 내부문서이지만 ‘시네마현 고시 제40호’(1905년)와 더불어서 ‘포츠담선언(1945년)’의 이후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1951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실효적 지배가 인정은 받을 수 있지만 국제사법 재판소의 판단은 조금 다르게 주어질 수 있다. 국제사법 재판소에서의 재판은 가장 최근의 조약이나 협약, 협정을 가장 중요하게 본다는 것이 국제법학자들의 해석이다. 그러나 일본의 그 어떤 주장도 허점은 있다.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1951년)’등을 통해서 일본이 주장하고 싶은 것은 ‘울릉도, 거제도, 거문도를 반환한다고만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허구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도서(島嶼)가 3개만 있는 것이 아니며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 섬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일본의 입장은 전자는 인정하지만 후자, 즉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 섬이라는 사실은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고시한 것을 근거로 엉뚱한 주장을 펼치려 하는 것이다.
그들은 1905년에 국제법적으로 적법하게 편입하여 선점했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12차 회담 중 독도를 한국에 반환해야한다는 논의가 많이 있다가 최종적으로 일본의 일방적인 주장이 거세었기 때문에 이 논의를 무시하고 독도반환 조항을 삭제한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에 국제사회가 독도를 일본 땅으로 인정하였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 정부는 「인접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선언」 (국무원 고시 제14호, 일명 평화선 선언)을 공포하였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로 인해 1945년에 설정된 맥아더 라인이 폐지되면 일본 어선이 몰려올 것으로 예상하여, 우리나라의 어업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이승만 대통령 명의로 모두 4개 조로 된 평화선 선언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 선언을 통해 한반도와 그 주변도서의 인접해양에 있는 모든 자연자원(수산물, 광물 등)에 대해 우리나라의 주권을 선언하였으며, 그 해양 경계선도 그었다. 우리 정부는 독도를 평화선 내에 둠으로써 대한민국의 주권이 미치는 부속도서임을 명확히 하였다.

▲ 일본실학자 ‘하야시 시헤이’의 삼국접양지도

독도는 역사적 국제법적 실효적 점유에서 명백하게 대한민국의 영토이다. 독도에 대해 대한민국은 ‘실제 영유권’을 갖고 있다. 독도 영유권을 100으로 표시한다면 대한민국은 100을 모두 갖고 있는 데 비해 일본은 0을 갖고 있다.
한일 양국이 소장하고 있는 독도 영유권 관련 사료가 정확히 몇 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대략 1천여 점이 있다고 볼 때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일본식의 유일한 증거는 ‘시마네현고시 40호’뿐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정당성을 가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국제법상 영토취득의 주체는 국가여야 하는데 그들은 지방정부가 고시했다는 것만 가지고도 정당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단지 일제가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1906년 2월 서울에 한국통치기관인 통감부를 설치하여 한국의 저항을 전적으로 제압했기 때문에 우리의 땅이 일제의 침략행위에 짓밟혔을 뿐이다.

 일본은 독도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실제 영유권의 소유’와 ‘주장’사이에는 천양지차가 있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 사이에 독도영유권 분쟁은 없다. 독도영유권 논쟁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일본은 독도영유권 논쟁을 시작한 이래 독도 침탈 전략의 하나로서 1954년부터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서 독도영유권을 재판받고자 제의하고 있다. 국제법상 연합국 기관인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1946년 독도의 영유권에 대해서 한국 영토로 판정, 독도를 주한미군정에 반환했고,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독도를 즉각 인수하여 대한민국 영토로서 통치하면서 1948년 12월 12일 국제연합으로부터 국제 사회의 합법적 주권국가로서 승인받아 당시의 영토(독도 포함)에 대한 통치권을 국제연합에서 공인받았다.

▲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울릉도, 독도, 제주도, 대마도

뿐만 아니라 연합국이 1951년 대일본 강화조약 체결 준비로 1950년 합의 작성한 [연합국의 구일본 영토 처리에 관한 합의서]에서도 명문으로 독도를 거명하면서 ‘대한민국 주권의 영토’임을 명백히 규정하였다. 그러므로 대일본 강화 조약 본문에 ‘독도’이름이 한국 영토와 일 본 영토 모두에서 누락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 내부 부수문서인 [연합국의 구일본 영토 처리에 관한 합의서](1950년)와 [연합국최고사령부 지령 제677호](1946년) 등에 의하여 독도는 국제법상 명백하게 한국 영토임이 판정된 것이다.

따라서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 명백하게 대한민국의 고유 영토이기 때문에 이미 판정받은 한국 영토를 또 판정해 달라고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름다운 대한민국의 독도를 잘 지키고 보전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1951년 일본은 6,000페이지에 달하는 한일협정문서 가운데 150쪽이 먹칠된 한일협정문을 공개했다. 이 협정문서는 일본 피해 보상 문제가 협의 되었던 것이다. 이 문서 속에서 ‘독도는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것이 명문으로 규정된 법령이 있었다. 1951년 2월 13일 공포한 「대장성령 제4호」, 같은 해 6월 6일 공포한 「총리부령 제24호」이다.
「대장성령 제4호」는 ‘구령(舊領)애 의해 공제조합 등에서 연금을 받는 자들을 위한 특별조치법 제4조 제3항 규정에 기초한 부속 도서를 정하는 명령’이다. 이 명령에서 ‘울릉도, 독도, 제주도’는 부속도서에서 제외시켰다.
「총리부령 제24호」는 조선총독부 교통국 공제조합이 소유한 일본 재산을 정리하기 위해 제정한 상위법을 시행하기 위한 세부사항을 정한 것으로 일본의 부속도서에서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역시 제외시켰다.

▲ 2013년 12월 8일 제정된 방공식별 구역도

일본의 우리나라 영토 침략은 이처럼 지금도 현재 진행형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에 맞서는 우리의 대응은 일본의 허구를 이길 수 있는 적극적인 대응을 하여야 할 것이다. ‘러일전쟁’으로 무단 침범하고 약탈한 독도가 결코 일본의 영토가 될 수 없으며 이러한 무단 침략은 ‘카이로 선언’에 근거하여 반환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영토 침략에 대한 대응을 해 나아갈 때에 ‘독도는 우리의 영토’라고 하는 감정적인 대응이 아니라 철저한 논리적인 대응을 보다 더 면밀하게 준비해서 결코 일제의 야욕에 우리의 땅이 강탈당하는 아픔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 2016년 6월 21자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

 

■ 박기성 목사 / 경찰뉴스 편집국장, 예드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