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바로알기 이슈 잊지말자 6.25

[역사바로알기] 동족상잔의 비극 6.25 사변의 진실

북괴군의 남침

6.25사변’은 우리 한국 민족사뿐 아니라 세계역사를 굽이지게 틀어 놓은 국제적인 대 환란이었다.
3년여(1950.6.25.~1953.7.27)간의 동족상잔의 비극과 동서양 대진영의 투쟁을 돌아보면서,
특별히 전쟁 이후에 태어난 젊은이들로 하여금 잊히거나 잘못 이해되서도 안 될,
그리고 다시는 그런 비극적 상황을 맞아서도 안 될 것이라고 다시 한 번 다짐해야 할 것이다.
전쟁의 역사적 교훈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피로 얼룩진 희생의 대가를 통해
얻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소중하게 간직하여
다시는 이 땅에서 6.25와 같은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힘쓰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들어가면서…

2019년은 동족상잔의 비극인 6. 25가 발발한지 69주년이 되는 해이다. 8.15광복을 맞은 지 불과 5년만인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주일) 북괴의 전면남침으로 시작된 이 사변은 장장 3년 1개월간이나 지속되며 수많은 동족간의 피비린내 진동하는 참상을 불러왔다. 그 참상 속에 1953년 7월 27일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분단의 아픔을 안고 전쟁이 일단 끝났다. 전선의 포화는 멎었고 전쟁은 끝났다고 하지만 종전상태가 아닌 휴전상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전쟁의 연장 속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겠다. 6.25사변으로 우리 민족은 반만년의유구한 역사를 통해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6.25사변’은 우리 한국 민족사뿐 아니라 세계역사를 굽이지게 틀어 놓은 국제적인 대 환란이었다. 3년여(1950.6.25.~1953.7.27)간의 동족상잔의 비극과 동서양 대진영의 투쟁을 돌아보면서, 특별히 전쟁 이후에 태어난 젊은이들로 하여금 잊히거나 잘못 이해되서도 안 될, 그리고 다시는 그런 비극적 상황을 맞아서도 안 될 것이라고 다시 한 번 다짐해야 할 것이다. 전쟁의 역사적 교훈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피로 얼룩진 희생의 대가를 통해 얻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소중하게 간직하여 다시는 이 땅에서 6.25와 같은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힘쓰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젊은이들에게 먼저 당부하고 싶은 것은, 모든 사물; 우리가 접하는 ‘현상’들에는 각기 ‘진실’이 있는 반면에 그와 반대되는 ‘거짓’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젊은이들 대부분이 배우고 또는 알고 있는 ‘6.25’의 ‘진상’이란 것에 혹 반대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 또는 이념의 다름으로 인하여 교단에서 학생들 에게 다르게 가르치는 사람들(세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실로 적지 않은 많은 젊은 층에서 잘못 알고 있다. 필자도 청소년들과 종종 대화를 하다 보면 북괴군의 6.25 남침을 반대로 알고 있는 순진무구한 청소년들이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2016년도에 상영했던 ‘인천상륙작전 영화’속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이념은 피 보다 더 진하다. 실로 섬뜩한 말이 아닐 수가 없다. 피보다 진하다는 이념 하나에 선동되고 매수된 수많은 김일성의 추종자들이 부모를 인민재판에 넘기고 자식이 직접 부모를 총살시키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이 글은 우리 민족과 직접 관련되는 운명적 사건이었던 세계 제2차 대전, 즉 일본제국주의 군대가 미국 하와이 진주만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해군부대를 기습 공격하는 날부터 하여, 6.25전쟁이 발발 4일만인 1950년 6월 28일 북괴군이 이른 아침 수도 서울 진입 개시일까지 북괴 김일성의 전쟁 준비 과정 등을 기술하여 보았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의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 그 ‘진실’을 반드시 바로 알아야 되고 알려야 한다.

1. 1945. 6. 8,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     2. 일본, 무조건 항복 서명, 미주리함상
3. 38선 설정 때, 1945년 설정    4. 여기가 북위38도선입니다!

1. 8.15해방 이전(일본 제국주의 강점기)의 상황

가.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공격’

1941년 12월 8일(미국시간 12월 7일 일요일 새벽) 제국주의 일본의 해군은 태평양 가운데 있는 하와이 오하우섬의 진주만(眞珠灣, Pearl Harbor)을 기습 공격하였다. 미국 태평양 함대와 이를 지키는 공군과 해병대를 대상으로 감행하였다. 이 공격으로 12척의 미 해군 함선이 피해를 입거나 침몰했고,188대의 비행기가 격추되거나 손상을 입었으며 2,403명의 군인사상자와 68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12월 7일 이날을 치욕의 날로 선포했고, 그로부터 3일 뒤 미국 의회는 전쟁을 선포했으며, 미국인들은 일본이 본토로 쳐들어 올 것을 대비해 전쟁 준비를 했고, 애국심에 군대에 자원하는 사람도 많아졌다고 한다.

나. 태평양 전쟁의 확대와 종결

1941년 12월 7일(하와이 시간) 07시(일요일): 소위 ‘대일본제국’의 해군항공기들이 하와이 오하우 섬의 진주만에 있는 미국 태평양 함대를 기습적으로 공격을 가하였다. 일본 해군 연합함대는 항공모함 6척, 전함 2척, 순양함 3척, 구축함 11척으로 이루어졌으며, 하와이 북쪽 440km 지점에서 어뢰를 탑재한 함재기 36대를 출격시켰다. 이에 따라 일요일 아침 잠들었던 미군들은 혼비백산하였고, 1차 공격에 전함 3척과 수많은 군함들이 격침되었으며, 제2차 공격에서도 전함 4척이 큰 손실을 입었다. 군인 사상자는 사망자 2,300명을 포함 3,400명에 달하였으며, 180여 대의 비행기가 파괴되었다. 미국 의회는 12월 8일(단 1명을 제외) 전원의 찬성으로 일본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로써 태평양에서도 세계 제2차 대전 전쟁이 불붙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1910년 우리 한국을 강제 합방하여 30여 년간을 강점하여 왔으나, 이 날을 계기로 하여 ‘대한’의 독립을 보장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운명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미국은 이 날을 잊을 수 없는 ‘Remember Pearl Harbor’라고 하고 있지만, 우리 대한민국도 이날을 ‘8.15 해방을 오게 한 날’로서 ‘잊을 수없는 날’로 기억되어야 하겠다. 이날로 미국은 팽창주의적, 군국주의적 일본과 일대 대결을 하기 시작한다.

진주만 공격 이후에 일본은 필리핀과 동남아시아 제국을 침탈하였으며, 현 인도네시아 지역 남태평양 일대를 점령하는 것 같았지만 반격을 준비한 미군 등 연합군의 공세로 미드웨이 해전을 비롯한 여러 해전에서의 승리로 미군들이 일본 본토에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유황도 및 오끼나와를 공략한 미군은 드디어 일본 본토에 원자폭탄(原子爆彈)을 투하하기에 이른다.

1943년 11월 25일: 미국, 영국 및 중국의 3개 연합국이 이집트의 카이로에 5일간 모여, 일본에 대한 전략을 토의헀다. 이 가운데는 ‘한국을 자유 독립국가’로 승인할 결의도 있었다. 즉, 처음 있은 ‘국제적 독립국가 승인’이었다.

얄타 회담
1945년 2월 4일~11일: 미국(루즈벨트), 영국(처칠) 그리고 소련(스탈린)의 수뇌들이 얄타(현 우크라이나 영토)에 모여 나치 독일의 패전과 그 관리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포츠담 선언

1945년 7월 26일: 연합국 세 수뇌인 미국(트루먼), 영국(처칠) 및 중국(장제스, 장개석)이 포츠담에 모여서 일본의 항복 권고와 제2차대전 이후의 일본에 대한 처리(處理) 문제를 논의하고, ‘포츠담 선언’으로 공포되었다, 그리고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도 참전과 동시에 이 선언에 서명하였다. 선언의 요지는 “일본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에 직면하게 될 것을 경고한 것이며, 그 내용은 모두 13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제1항~제5항 – 서문. 일본의 무모한 군국주의자들이 세계인민과 일본 인민에 지은 죄를 뉘우치고 이 선언을 즉각 수락할 것을 요구.제6항 – 군국주의 배제.
제7항 – 일본 영토의 보장 점령.
제8항 – 카이로선언의 실행과 일본영토의 한정.
제9항 – 일본군대의 무장 해제.
제10항 – 전쟁범죄자의 처벌, 민주주의의 부활 강화, 언론· 종교· 사상의 자유 및 기본적 인권존중의 확립.
제11항 – 군수산업의 금지와 평화산업 유지의 허가.
제12항 – 민주주의 정부 수립과 동시에 점령군의 철수.
제13항 – 일본군대의 무조건 항복.

그러나 일본은 이 포츠담 선언을 묵살했으며, 이에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廣島)에, 8월 9일 나가사키에 각기 1발씩의 원자폭탄을 투하하였고, 소련도 8월 8일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와 함께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8월 폭풍 작전)참고로 소련은 애당초 일본과는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바 있었다.
* 히로시마에 ‘리틀 보이’ 투하.

2. 8.15해방과 38도선 설정으로 한반도 분할(分割)

가. 소련군의 만주, 한반도 침공 (侵攻)

1945년 8월 7일 일본 히로시마에 신형폭탄이 투하됐다는 소식을 들은 스탈린 소련 수상은 일본에 대한 공격을 명령하였다. “전쟁의 열매는 힘으로 따지 않으면 확실히 맛볼 수 없다”라고 주위 부하들에게 이야기하면서, 8월 9일 새벽 0시 소만국경(蘇滿國境)에 진주해 있던 소련 붉은 군대는 일제히 국경을 넘어 만주로 쏟아져 들어갔다. 이 작전에는 소련군 157만 명과 화포, 박격포 26,137문, 전차와 자주포 5,566량, 군용기 3,721대를 동원했다. 소련군의 진격은 만주에 그치지 않고, 이틀 후에는 한반도 동해안의 경흥, 함흥까지 밀고 내려왔다.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은, 만주를 북중국에서 고립시키고 한반도로 나가는 통로를 마련해 나갔다. 그리고 제일 먼저 일본 관동군 수뇌부와 푸이황제(皇帝)를 비롯한 일본의 괴뢰국 만주국(滿州國)의 황족과 수뇌부를 연행해 전범재판에 넘겼다. 이어 ‘전리품’이 된 공장 등 산업시설을 뜯어내 기차에 싣고 소련으로 가져갔다. 포로로 잡힌 관동군 60만 명은 노동력으로 활용하기 위해 시베리아로 끌고 갔다.

이 와중에 군기가 풀린 소련군은 도처에서 약탈과 강간을 일삼았다. 소련군의 군정(軍政)이 실시되자 ‘중국 공산당’은 그 기회를 틈타 세력을 확대해 나아갔다. 일본군이 떠나자, 만주 각 지역에서 중국인에 의한 조선인 박해 사건이 잇따랐다. 특히 조선인 비율이 낮은 마을이 괴뢰만주국(傀儡滿州國)의 패잔병(敗殘兵)이나 마적(馬賊)들의 집중적인 공격대상이 되었다. 상황이 악화되자 조선인들은 생존을 위해 주거지를 버리고 하얼빈, 목단강, 가목사, 연길, 길림 등 좌익계열의 독립군인 항일연군(抗日聯軍)이 장악하고 있는 도시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반 국민당, 친 공산당(親共産黨)’으로 기울어 대거 그 군대에 입대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장차 조선인민군 또는 중공군으로서 6.25전쟁에 참전하게 됨.)

▲ 1950. 6. 25 북괴군 남침 진격하는 모습
▲ 6. 25남침 보병부대

나. 미국 ‘북위 38도선(北緯 38度線)’설정

소련의 진격에 당황한 미국은 한반도의 38선 분할을 결정했다. 1945년 8월 11일 미국의 국무부· 해군부· 육군부 3부 조정위원회(SWNCC)는 그동안의 미 육군부 제안들을 바탕으로 38선 이북은 소련군이, 이남은 미군이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도록 하는 ‘38선 분할’초안을 기안했다. 38선 분할(안)이 최종 결정되기 전인 8월 12일에 이미 웅기(雄基)· 나진(羅津) 등에 진주한 소련군도, 미국이 제안한 이 조항을 반대 없이 받아들였다. 이어 태평양 방면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1945년 8월 15일 발표한 [일반명령 제1호]에서 “38도선 이북의 일본군의 항복은 소련이, 이남 일본군의 항복은 미군이 접수 한다”고 선언하여, 38선이 공식적으로 기정사실화되었다.

트루먼은 38선 분할 안에 대해 “한국에서 힘의 공백이 생겼을 때 실질적해결책으로 우리들에 의해 제안된 것”이라고 회고했다. 38선 확정은 별도의 미·소 간 비밀협약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미·소 간 항복접수구획선’으로 제안된 미 육군부의 건의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군사작전의 구획설정을 위해 편의적으로 그어진 작전구획선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38선은 전후 한반도에 단일세력 진입을 막기 위한 신탁통치안, 제2차 세계대전 중 군사점령과 항복접수를 일국에 맡길 수 없다는 구획선안 등, 전후처리(戰後處理) 과정에 줄곧 내재된 미·소의 국제정치적 흥정과 이익이 작용한 결과이다.

* 에드워드 L. 로우니 장군의 증언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공식 항복일(1945년 9월 2일) 직전 링컨 장군의 상관인 조지 마셜 장군은 남북 분단선 설정 안을 건의토록 지시했다. 회의에서 딘 러스크 대령은 한반도에서 가장 폭이 좁은 곳이어서 군사분계선 방어에 많은 병력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39도 선에 긋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링컨 장군은 예일대 지리학과 교수인 스파이크만이 1944년 저술한 ‘평화의 지리학’을 인용하면서 38도 선을 지목했다. 스파이크만은 38도 선 북쪽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학설을 제기한 인물이다. 상황을 지켜본 로우니 장군은 [운명의 1도]에서, “돌이켜 보면 잘못한 일” 이라며 “39도선 방어가 훨씬 쉬웠을 뿐만 아니라 많은 미군 생명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45년 7월 미국, 영국, 소련의 세 거두가 포츠담에 모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루즈벨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인해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트루먼은 공산주의를 경계하는 인물이었다.

회담 직전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다는 비밀 전문을 받을 수 있었던 트루먼은 소련의 도움없이 일본을 단독으로 패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뒀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군은 인류 최초,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투하하여 수 십 만의 사람들이 사망했다. 일본에 원폭이 투하된 직후, 소련군이 대일전 참전을 선언했다. 소련으로서는 전투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도 실리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소련의 태평양 함대는 웅기, 나진에 상륙작전을 전개했다. 무서운 기세로 남하하던 소련군은 개전 6일 만에 이미 한반도 북부의 상당 부분을 점령했다.

당시 미군은 아직 오키나와에 있었다. 한반도에서 1천km나 떨어진 곳이다. 미군은 소련군이 한반도를 단독 점령할 것을 우려해 한반도 점령 계획 일부를 수정했다. 하지 중장의제24군단을 중화기 없이 경장비만 갖추게 하고 급히 한반도로 이동 시켰다. 예상치 못한 소련의 참전과 빠른 남하 속도에 당황한 미국은 소련의 단독 점령을 막기 위해 분주해졌다. 단지 두 점령군의 작전 지역을 구분하기 위한 선, 그것은 북위 38도 선이었다.

* 예브게니 바자노프, 러시아 아카데미 부원장 증언

“1945년에 한국은 스탈린에게 어떠한 중요한 의미도 역할도 하지 못했습니다. 일본과 중국이 있었고, 일본은 파괴하고 약화시켜야했던 나라였습니다. 스탈린은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주에서부터 38선 지점까지 군대동원하기로 합의를 했습니다.”

* 리챠드 알렌, 전 미국 백악관 안보보좌관 증언

“ 아시아에서 미래를 결정하는데 소련에게 동등한 지위를 준 것이 실수였습니다. 특히 한국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소련은 단지 6일 동안 극동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스탈린이 한 일은 그게 다였지만 북한에 손을 뻗었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독일처럼 38선에 의해 나라가 분리됐습니다.”

– 북위 38도선이라는 낯선 경계는 일반명령 1호에서 처음 그 존재를 드러냈다.

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 1945년 8월 15일 일왕(日王)의 선언

일본의 항복은 일본이 8월 14일에 연합국에 통보하였고, 8월 15일정오 12시에 일본의 쇼와(소화)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9월 2일, 일본 도쿄만(東京灣)에 정박한 미국 해군 전함 미주리, USS Missouri,BB-63 함상에서 일본대표가 정식으로 항복문서에 서명을 하였다. 이 항복으로 세계 제2차대전은 종결되었다.

3. 남한에서의 미군정 시행 및 대한민국 수립

가. 미군의 서울 입성, 일본군 항복 서명 및 군정 시행.

1945년 9월 9일 일본군의 항복을 받으려고 인천항을 거쳐 한국을 찾아 온 미군은 오후 4시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일본총독 아베 노부유끼가 미국 육군 제24군단의 존 하지 중장과 제7함대 사령관 킨 케이드 제독 등 미군 장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서명을 하였다. 이 항복 문서는 ‘38선 이남’에만 적용된다는 특색이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총독부 앞뜰의 국기게양대에서, 일본국기(일장기)가 하양되고, 미국 성조기가 게양되는 예식이 거행되었다. 한반도(38선 이남)의 통치권이 일본 제국주의 총독부에서 미군정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안타깝게도, 일본 국기는 8월 15일부터 계속 게양되어 있었으나 통치권 문제로 태극기가 게양되지 못하는 운명이었다. 그 23일 간 후에야 성조기가 뒤이어 게양되는 ‘국가’없는 서글픈 약소민족의 쓰라린 고뇌의 기간 이었다. 그리고 3년 후에야 태극기가 이 게양대에 올려 지게 된다.

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통해 제헌국회를 구성,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였다.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다.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미·영·중·소 4개국에 의한 최고 5년의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었다. 이 안이 국내에 전해지자, 임정을 중심으로 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되어 반탁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신탁운동을 둘러싸고 임시정부측은 결사적으로 반탁을 주장한 반면,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등 좌익 측은 찬탁을 주장하여 의견이 엇갈리게 되었고, 이리하여 좌우의 제휴에 의한 민족통일공작은 절망적인 것이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1946년 1월, 미·소 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이 열렸고, 이어 3월에는 정식 위원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회의가 거듭되는 동안 차츰 결렬 상태에 빠졌고, 이 혼돈 속에서 타개를 위한 몇 가지 방도가 모색되었던 것이다. 첫째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민당이 호응하여 조직한 민족통일 총본부의 자율정부운동이었다. 얄타회담과 모스크바 3상 결의를 취소하여 38선과 신탁통치를 없애고 즉시 독립 과도정부를 수립하라는 것인 정읍발언이었다. 한편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계통의 한독당은 국민의회를 구성하여 반탁운동을 근본으로 하되 좌우합작과 남북통일을 실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런가 하면 김규식, 여운형 등 중간우파와 중간좌파가 주도하여 좌우합작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이들 좌우합작운동 주도세력들인 중도파 인사들은 ‘선임정후반탁’(先臨政後反託)을 주창하여 찬탁의 입장에서 미·소 공동위원회의 재개를 통해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동시에 좌익세력들은 남한의 정치·경제·사회를 교란하는 여러 수단을 사용하였다. 1946년 5월 ‘정판사 위폐사건’을 계기로 공산당은 지하로 숨어들었고, 부산의 철도 파업을 계기로 일으킨 대구 폭동은 그들의 지하운동의 대표적인 예였다. 이 사건 이후 미군정은 12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창설하였고, 1947년 6월에는 미군 정 청을 남조선 과도정부라고 칭하였다.

1947년 5월에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다. 그러나 이 무렵 미-소 냉전이 격화되면서 미·소의 의견대립으로 양측의 입장만 확인한 상태로 완전 결렬되고 말았다. 1947년 9월 17일 미국은 한반도의 문제를 UN에 제출하여 이관(移管)하였다. 미국은 한국에서 UN감시 하에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 결과 정부가 수립되면 미·소 양군은 철수할 것이며, 이러한 절차를 잠시 협의하기 위해 ‘유엔 한국 부흥위원단’을 설치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이 결의안의 수정 통과로 UN 한국위원단은 1948년 1월에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반대로 북한에서의 활동은 좌절되었다. 1948년 2월의 UN총회에서는 가능한 지역 내에서만이라도 선거에 의한 독립정부를 수립할 것을 가결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1948년 5월 10일에 남한에서만의 ‘총선거(總選擧)’가 실시되어 5월 31일에는 최초의 국회(國會)가 열렸다. 이 ‘제헌국회(制憲國會)’는 7월 17일에 헌법(憲法)을 공포하였는데, 초대 대통령(大統領)에는 이승만(李承晩)이 당선되었다. 이어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政府樹立)이국내외에 선포(宣布)되었으며, 그해 12월 UN총회의 승인(承認)을 받아 대한민국 (大韓民國)은 한반도의 유일(唯一)한 합법정부(合法政府)가 되었다.

4. 북한에서의 소련군정 시행 및 김일성 등장: 인민위원회 / 정권 수립

일제강점기가 종식된 뒤, 소련은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는데, 그들의 목적은 동구라파에서의 정책과 마찬가지로 한반도의 북부나마 소비에트화(化)로의 정책이었다. 이 기간에 김일성으로 하여금 소비에트로의 정부를 수립토록 조종하였다. 보통 미군정과 더불어 소군정이라고 부르지만, 당시 소련입장에선 공식적으로는 ‘민정’, 즉 민간 정부로 칭했다. 소련은 종전 후 독일 같은 전범지역에서만 군정이란 말을 썼고, 추축국의 피해지역(폴란드, 북한 등)에서는 민정이란 말을 썼다. 1945년 8월, 만주 작전으로 일본군과 교전하며 청진 등의 북한 지역에 진입한 소련군은 8월 말경에는 북한 전역을 장악하였다.

중앙청에-太極旗가-내려지고-人共旗가-올라갔다

1945년 8월 26일, 소련 연해주군관구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은 “조선인민들이여, 그대들은 독립과 자유를 회복했다. 이제 그대들의 행복은 바로 당신들 손에 달려 있다”고 언명했다. 또한 소련군정은 미군정처럼 직접 통치가 아닌 간접 통치를 표방하며 각지에 세워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지부와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였다. 소 군정 내내 북한지역에서는 소련군에 의한 강간, 폭행, 약탈이 끊이지 않았다.

소련군 중좌 페드로프는 소련군이 1945년 8월부터 이후 5개월 간 북한지역에서 벌인 행태를 기록했는데, 12월 29일 작성된 해당 문서에는 “우리 군인(소련군)의 비도덕적인 작태는 실로 끔찍한 수준이다. 사병 장교 할 것 없이 매일 곳곳에서 약탈과 폭력을 일삼고 비행(非行)을 자행하는 것은 (그렇게 해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고 전제하면서 “우리 부대가 배치된 시(市)나 군(郡) 어디서나 밤에 총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범죄도 만연해 있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소련이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한 1945년 9월경, 소련은 김일성을 평양으로 귀국시켰다. 김일성은 평남 인민위원회에 가입하였으며, 1945년 10월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가 세워졌다. 이를 즈음하여 조만식은 조선민주당을, 김일성은 조선공산당 북조선지부를 세워 정치 활동에 나섰다. 한편 1945년 10월 소련은 포고령을 발표하여 여러 조선인 무장단체를 해산하였고, 군대격인 ‘조선보안대’를 창설했다.

그러나 신탁통치안이 발표되면서 조만식 등이 반탁 운동에 나서자, 소련 측은 조선민주당을 탄압하고 조만식을 가택 연금해 사실상 정치 생명을 끊었다. 신의주 반공학생사건 등 반공 활동 또한 탄압하였으며, 조선의용군이 압록강 근처까지 진군해 들어오자 소련 포고령을 들어 이들을 무장 해제하는 사건도 있었다. 연안파가 일부 귀국하여 1946년 2월 조선신민당을 세웠으나, 이들은 국공내전에 참전하느라 일부 간부만이 참여했으므로 큰 세력을 갖추지 못했다.

이후 김일성 등은 공산주의적 소비에트 개혁을 진행해 나갔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세워진 1946년 2월부터 토지 개혁법, 8시간 노동제, 주요 산업의 국유화령 등이 제정되었으며, 이에 반발하여 월남한 사람들은 남한 내 반공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1946년 4월 북조선공산당이 세워졌는데 이는 남한 내 조선공산당의 정통성을 축소시킨 것이며, 단독 정부 수립에 대한 의도도 보인다. 이후 김두봉 등의 조선신민당을 통합하여 1946년 8월 북조선노동당으로 세력을 재편하였다.

이후 1947년 2월 북조선 인민 위원회가 세워지고, 단독 정부 수립 작업이 진행되어 1948월 2월경에는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었다. 1948년 4월경에는 남북연석회의가 열렸으나 형식상의 합의만이 이루어졌고, 김구와 김규식 등이 돌아간 이후로는 북한에 남은 인사들을 끌어 모아 6 ~ 7월에는 북한이 남한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고 있다는 선전용으로 ‘2차 남북연석회의’를 열었다. 이후 남한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는데, 북한에서도 ‘최고인민회의’를 개최하여 ‘사회주의 헌법’을 만들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 때 북한의 헌법에서는 수도를 서울특별시로 정하였는데, 이는 당시 남한 지역을 북한 정권의 미수복지로 보는 선언으로 볼 수 있다.

5. 김일성의 무력 남침 준비 군사력 확보

– 후에 러시아가 제공한 기밀문서 내용 중-

1949년 대한민국에서 미군이 철수하자 김일성은 고심 끝에 무력통일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이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지시문이 김일성에게 전달되었다.(1949년 9월 24일) 1950년 1월 17일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군정사령관)에게 남침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 대화에서 김일성은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다음에는 대한민국(남조선)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기강이 세워진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일성은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한 1949년 3월의 스탈린의 결정에 불만을 토로했다. 1월 30일, 스탈린이 서명한 전보를 평양으로 타전했다. 전문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큰일’에 관해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접견해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으며 그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3월 20일, 김일성은 스티코프와의 면담에서 4월 초에 자신과 박헌영이 스탈린과 만나고자 한다는 것을 전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김일성은 이번 방문을 46년의 방문처럼 비공식(비밀)으로 할 것을 제의하였다.

김일성은 남북한 통일의 방법, 북한경제개발의 전망, 기타 공산당내 문제에 관해 스탈린과 협의하기를 원하였다. 4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 데 동의하였다. 다만,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국과 북조선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국쪽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

5월 12일, 스티코프가 김일성 및 박헌영과 면담한 자리에서 김일성은 마오쩌둥과의 면담계획을 밝혔다.
“소련에서 돌아온 후 이두연 주 베이징대사로 부터 마오쩌둥과의 면담 결과를 보고받았다. 마오는 ‘조선통일은 무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미국이 남한 같은 작은 나라 때문에 3차 대전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마오와 면담하기 위해 5월 13일 베이징으로 출발할 것이다.
마오는 내가 대남 군사행동을 곧 시작할 생각이라면 비공식으로 만나겠다고 한다. 마오에게 북한으로 이양되는 중국군 소속의 조선인 사단을 위해 중국이 노획한 일본 및 미국무기를 제공해줄 것을 요청할 계획이다. 50년 6월께로 예정하고 있는 남침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하라는 지시를 북한군 총참모장에게 시달했다. 작전이 6월에 개시될 것이나 그때까지 준비가 완료될지 자신이 없다. ” 5월 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이 베이징에 도착하여 마오쩌둥과 면담하고 스탈린이 모스크바 회담 때 ‘현 국제환경은 과거와는 다르므로 북한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으나 최종결정은 마오쩌둥과의 협의를 통해 이뤄야한다’고 했음을 설명했다.

5월 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 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 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 5월 15일, 모스크바의 메시지를 받은 뒤 마오는 김일성 · 박헌영과 구체적으로 의견을 교환하였다. 김일성은 북조선이 ‘군사력 증강-평화통일 대남제의-대한민국 쪽의 평화통일 제의 거부 뒤 전투행위 개시’의 3단계 계획을 세웠다고 언급했다.

마오가 이 계획에 찬성을 표명하고 일본군의 개입 가능성을 물은 데 대해 김일성은 일본군이 참전할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으로 보나 미국이 2만~3만명의 일본군을 파견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참전이 상황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오는 만일 미군이 참전한다면 중국은 병력을 파견해 북한을 돕겠다고 했다. 소련은 미국 쪽과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가 있기 때문에 전투행위에 참가하기가 불편하지만 중국은 이런 의무가 없으므로 북한을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

북한이 현 시점에서 작전 개시를 결정함으로써 이 작전이 양국 간의 공동 과제가 되었으므로 이에 동의하고 필요한 협력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5월 29일, 김일성은 스티코프에게 4월 모스크바 회담시 합의된 무기와 기술이 이미 대부분 북조선에 도착했음을 통보하였다. 이 통보에서, 또한, 김일성은 새로 창설된 사단들이 6월말까지 준비 완료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북한군 참모장이 바실리예프 장군과 함께 마련한 남침공격 계획을 북한지도부가 승인하였고, 군 조직 문제는 6월 1일까지 끝내기로 했다. 북조선 군은 6월까지 완전한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게 된다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6월말 이후는 북한군의 전투준비에 관한 정보가 남쪽에 입수될 수 있으며 7월에는 장마가 시작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6월 8~10일께 집결지역으로의 병력 이동을 시작할 것이라고 보고되었으며, 김일성과 면담 뒤 스티코프는 바실리예프 장군 및 포스트니코프 장군과 의견을 교환했다. 그들은 7월에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시의적절하나 일기관계로 6월로 변경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와 같이, 김일성은 스탈린을 상대로 끈질기게 남침을 허락해달라고 48회나 요구했고 스탈린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는 이유로 계속 거절했다. 스탈린은 48번씩이나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요구하는 김일성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결국 남침을 허락하고 만다.

이 때 스탈린은 김일성을 북한의 통제관으로 옹립한 것을 후회했다. 1950년 3월에는 박헌영 당시 조선공산당 총비서와 허가이 조선노동당 책임비서와 함께 소련으로 물자 원조와 무기 공급을 요청하기 위해 방문했으며, 스탈린의 지원을 받아 남침을 감행했다. 전쟁 발발에서 김일성의 주동적인 책임은 고르바초프의 방한을 계기로 공개된 구 소련의 외교문서를 통해 증명되었으며, 국제학계의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3년 동안의 한국 전쟁 시기 교전 일방인 조선인민군의 최고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이끌었다.

서울-입성한-북괴군-전차부대-1950.6

6. 북괴군의 남침(남쪽으로 불법기습 침공, 南侵) 준비

가. 대한민국 후방지역의 정세

1) 제주도 4.3폭동 사건(48년 4월~49년 5월)
2) 여수, 순천, 국방군의 반란사건(48년 10월~49년 4월)
3) 대구 반란사건(3차: 48년~49년)

상기 여러 사건들은 지방 및 군대 내에 잠입한 공산분자들이 침투하여 폭동 또는 반란을 일으킨 사례들이다.

국방부 정보판단에 의하면 인민군 유격대에 의한 빨치산 침투사건은 1948년 11월~1950년 3월 기간에 10차, 2,400명에 의한 유격작전으로 약탈, 살인, 유언비어 유포 등 후방교란작전을 하였지만, 국군의 빨치산 소탕작전으로 많은 손실을 입고, 1950년 6월 24일 현재 지방공비 세력으로 270명이 잔존하고 있었다고 하고 있지만, 많은 병력이 잠적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 1950. 6. 25 북괴군 남침 진격하는 모습

나. 남침을 위한 준비들

김일성의 남침전쟁 제안에 스탈린이 조건부로 승인하고, 최종적으로 마오쩌둥이 동의함으로써 전쟁은 논의 차원을 넘어 실행단계로 들어섰다. 이에 김일성은 스탈린으로부터 받아온 종래 군사지원의 양과 질을 대폭 개선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스탈린은 해방 후부터 줄곧 북한의 전쟁준비를 도와 왔다. 특히 북한 주둔 소련군의 철수에 대비해 특별 군사고문단의 북한 파견을 지시하기도 했다.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40여 명으로 편성돼 북한으로 들어온 소련 군사고문단은 1949년 1월 말부터 북한 정규군의 돌격사단과 전투사단의 편성 및 전투훈련 지원과 함께 공군부대의 지원, 육·해·공합동기동훈련을 실시하면서 각종 소요장비를 제공했다.

스탈린은 북한이 선제공격을 하더라도 북한군의 전력이 한국군의 그것에 비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면 감행해선 안 된다는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 때문에 북한의 전력이 여전히 미비하다고 판단한 그는 1949년 3월 자신을 찾아온 김일성에게 남침공격은 시기상조라며 김일성의 조급함을 잠시 눌러 놓았다.그러나 스탈린은 남침 자체를 반대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기왕의 대북 군사지원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김일성이 소련 방 문전 1950년 1월 초순과 2월 초순 두 차례에 걸쳐 무기를 원조해 달라는 요청과 또 지상군을 10개 사단으로 증편토록 지원해달라는 요청을 모두 승낙했다.

그 결과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 귀국 후인 1950년 3월부터 6.25전쟁 개시 직전까지 당시 한국군에는 단 한 대도 없었던 소련제 T-34 전차, 자주포와 같은 다량의 기동장비와 각종 항공기 등이 집중적으로 북한에 운송됐다. 물론 무상은 아니었다. 무기장비 구입 대금은 소련이 차관으로 빌려준 2억루블과 북한산 각종 광산물로 결제하기로 했다. 스탈린은 또 북한 지상군의 증강에 따른 무기뿐만 아니라 해군창설에 필요한 소해정과 전투함 그리고 공군력 증강을 위한 교육 훈련용 항공기등도 지원했다.

물론 북한군 간부의 소련 군사학교 위탁교육을 통해, 혹은 소련 군사전문가들을 파견해 각종 중장비와 항공기를 조작, 운전할 수 있도록 기술지원도 했다. 각 사단에는 사단 고문관으로 대좌 급을 파견했을 뿐만 아니라 중대급까지도 군사전문가 150명을 배치했다. 또 전차, 항공부대에도 고문관들을 파견하여 전술훈련과 장비교환, 연료문제의 해결에서부터 정비 분야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지도했다. 한편 중국의 마오쩌둥도 김일성의 한반도 적화구상을 근본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단지 시기상조라고 여겼을 뿐, 시기가 도래하면 언제든지 지원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마오쩌둥은 중국내전이 끝나지 않은 관계로 그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한 지원할 수 있는 것부터 북한에 제공하기로 했다. 우선 제1차로 1949년 8월부터 중국공산당 인민해방군 소속 한인 부대 1만여 명을 북한으로 건네 줬다.

▲대동강 철교를 건너고 있는 피난민행렬

그 후 마오쩌둥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 내전의 최종 승리를 비롯해 소련과의 새로운 관계설정이 이루어진 후 1950년 전반기에 남침전쟁을 동의해 줬을 뿐만 아니라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여기서 소련과의 새로운 관계설정이란 마오쩌둥이 소련을 방문해 1950년 2월 중순 스탈린과 새로운 중·소 동맹을 체결한 것을 말한다. 중·소동맹의 체결은 여러 가지 정치적 의미를 띤 것이었지만, 6·25전쟁 발발의 한 배경적 요인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일본의 재침략 혹은 미·일양국의 직접 또는 간접적인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공동대응의 협력관계 구축과 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위한 동서 양면의 역할분담을 약정한 것을 뜻했다.

특히 중국에게 그것은 방심할 수 없는 잠재적인 적으로 인식한 소련과 새로운 동맹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역사적으로 늘 중국영토에 흑심을 품어온 소련의 위협을 잠정적으로 제거한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마오쩌둥에게 중·소동맹의 체결은 북방으로부터의 국가안전의 확보를 의미했다. 또 그것은 그가 김일성의 남침전쟁 발의에 대해 동의 가부를 결정짓는 최소한의 선결조건이었다. 그래서 그 조건이 실현되자 마오쩌둥은 스탈린으로부터 전쟁발동을 결정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그 때까지 중국국민당군의 소탕에 총력을 기울이던 종래의 방침을 바꿔 북한을 전향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1950년에 들어와 중국공산당 수뇌부는 중국에 잔류한 나머지 한인병사들의 북한이송 문제 협의차 북경을 방문한 김일성의 특사 김광협에게 약속한 대로 전년도에 이어 또 다시 1만 4,000여 명의조선인 병사들을 북한에 인도해 줬다 이 병력은 4월 중순 북한으로 이송됐는데, 송환은 그들의 자유의사에 따른 게 아니라 중국공산당과 북한정부가 강행한 것이었다. 중국의 이 조치는 북한이 소련으로부터 무기장비를 지원받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병력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판단에서 취해진 것으로서 마오쩌둥이 소련방문 기간 중인 1950년 1월 중순에 내린 지령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중국의 군 고위층은 북한군이 소련의 무기로 무장하고 있지만 병력면에서 3,000만 인구의 남한과 정면대결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처럼 중국은 1949년부터 다음 해 6.25전쟁 발전까지 2년에 걸쳐 3개 사단과 2개 연대 병력 최소 5만 명 이상의 조선인 사병과 개인용 화기 등의 각종 경 장비를 북한으로 들여보냈다. 중국의 전폭적인 협조로 입북한 그들은 주로 북괴군 제5·제6·제12사단 등에 편입됐다. 북괴군에 이첩된 조선인 병력은 개전 초기 북괴군 10개 사단 총 18만여 병력 중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이 점을 감안하면 전쟁 전 중국공산당이 인계해준 조선인 병력은 남·북한의 군사력 균형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린 요소 가운데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김일성의 남침공격을 결정지은 중요한 조건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북한이 군사장비와 병력 확보를 소련에만 의지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다. 남침 전야 (1950년 6월 24일)

북괴군 제1군단은 금천에, 제2군단은 화천에 각기 군단 사령부를 설치하였고, 그 예하 사단은 서부전선으로부터 제6, 1, 4, 3, 2, 12, 5사단 순으로 배치되었으며, 제13, 15사단은 북괴군의 예비대로서 금천과 화천에 각각 배치되었다 그리고 제10사단은 북괴군의 예비사단으로 숙천에 위치하였다. 북괴군의 남침공격 암호명 ‘폭풍’, 1950년 6월 24일 공격개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라. 남침, 서울 점령과 UN의 조치

이오지마-점령한-미-해병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괴뢰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전면 남침을 개시하였다. 전쟁발발 소식을 접한 미국은 25일(미국 시간) ‘UN 안전 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하여 북한의 무력공격은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 행위’라 선언하고, 북한은 즉시 전투행위를 중지하고 그 군대를 38 선으로 철퇴시킬 것을 요청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UN 회원국들로 하여금 UN에 원조를 제공할 것과 북한에 대하여는 어떤 원조도 중단되었고, 6월 27일에 이르러 미국 대통령 트루만은 미국의 해군, 공군으로 하여금 한국군을 지원하도록 명령하였다.

남침을 감행한 북괴군은 계속 남하하여 27일 저녁에는 서울 외곽지대인 미아리 고개까지 밀고 내려왔으며, 28일 오전에는 소련제 탱크 T-34를 앞세우고 미아리 고개를 넘어 서울 시내로 진격해 들어왔다. 들어온 보병부대는 서울대학병원에 부상을 당하여 입원하고 있는 국군장병 수십 명을 병실에 들어가 총살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여기서 한강교를 폭파하여 수많은 서울 시민들이 희생된 아쉬운 사건이 발생하였었는데, 이 일이 27일 밤에 발하였었다. 미처 남쪽으로 피란을 가지 못한 수많은 시민들은 그 후 3개월 동안(9월 28일까지) 공산 치하에서 자유 없는 고난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UN기(旗)를 수령하는 맥아더 UN군 사령관

UN 안전 보장 이사회는 UN회원국들에 대하여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국제평화와 한반도에서의 안전을 회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권고를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군사조치를 추후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곧 이어 6월 28일에는 동경(東京)에 있던 미 극동군사령관인 맥아더 원수가 수원 비행장으로 내한하여 한강 남쪽, 노량진에서 전선을 시찰하고, 미 국방성에 지상군의 파견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미국의 군사조치는 다시 7월 7일에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한반도에서의 UN의 군사 활동을 위하여 미국에게 최고 지휘권을 위임하는 결의를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맥아더가 UN군 총사령관에 임명되고, UN군에 많은 우방국가가 파병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한반도에서의 군사지휘권은 미국의 맥아더 원수에게 주어졌으며, 한국을 원조하기 위하여 육군과 해군. 공군 및 지상군을 파견한 16개국의 군대는 UN군사령관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때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도 한국군에 대한 작전 지휘권을UN군사령관에게 이양한다는 각서를 썼는데, 이것이 이른바 대전각서로서 7월 14일에 수교되었다.

■ 편집부

화보로 보는 6.25 


개전 초기 국군 제6사단의 활약상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이 38선을 넘으면서 전쟁은 시작됐다. 수도 서울을 함락시킬 계획을 세운 북한군은 춘천을 거쳐 48시간만에 수원을 점령하는 것으로 노선을 잡았다. 북한군은 122㎜ 곡사포에 37㎜와 76.2㎜ 대전차포, SU-76 자주포까지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에 맞선 국군은 105㎜ 야포만 겨우 갖춘 소총중대였다. 그것도 최전방엔 소총부대가 앞장섰다. 하지만 북한군은 춘천에서 의외로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만 했다. 북한은 애초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38선을 뚫은 뒤 홍천을 거쳐 48시간 내 수원을 점령하면서 수도 서울에 입성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국군은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전쟁을 맞아 육탄전을 불사하며 3일간 춘천지역을 사수했다. 이 틈에 우리 군은 어느 정도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벌었고, 낙동강방어선까지 구축할 수가 있었다. 또 춘천 제6사단이 북한군을 막고 있을 그때 유엔군 지원이 결정됐으며, 곧바로 맥아더 사령관이 비행기로 날아와 수원비행장에 내릴 수 있었다. 이후 춘천지역 방어부대였던 제6사단은 낙동강방어선까지 밀려 내려갔다가 다시 북으로 진격했을 때에도 가장 처음으로 압록강에 태극기를 꽂았다.

1950년 6월 28일
서울대 병원의 북괴군의 대 학살 사건

지금은 이 만행도 거의 잊혀져 가고 있다. 외국 같았으면 수도의 중심부에서 그런 대학살이 있었음에도 국민들이 추모비 하나 달랑 세워놓은 것 말고는 다 잊고 있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1950년 6월 28일 아침, 북한군은 붕괴된 미아리 방어선을 뚫고 그 길을 따라 서울로 들어와서 중앙청으로 향했다. 본대와 갈라져 나온 200여 명의 한 북한군 지대는 아침 9시가 조금 지나 서울대 병원을 공격하였다.

서울대 병원은 사흘간의 서울 북부 전선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무턱대고 실려 온 국군 부상환자로 만원 상태였다. 서울대 병원의 환자들은 전선이 무너진 상황에 모두 후방으로 긴급 후송이 되었어야 했는데, 후송 대신 1개 소대가 경비 병력으로 파견되어 있을 따름이었다. 밀려오는 대군의 적 앞에 1개 소대를 던지듯이 놔두고 남으로 도주한 것은 6.25전 초기 국군 수뇌부가 많이 저지른 생각 없었던 행태 중의 하나다.

경비 소대는 용감히 싸웠지만 한 시간도 안 되어 소대장 남 소위와 선임하사 민 중사를 포함, 부대원 대부분이 전사했다. 저항 병력을 일소하고 서울대 병원에 난입한 북한군은 외곽은 물론 각 빌딩마다 병력을 배치했다. 당시 서울대 병원은 현재 대 본관이 있는 자리에 1, 2, 3, 5 동의 병동이 있었으며, 침대 수는 800석이었다. 각 병실마다 갑자기 밀려들어온 국군 부상자와 민간인들이 뒤섞여 아비규환이었으며, 침대가 부족하여 국군 환자들은 입원실 바닥이나 복도에까지 누워서 생사를 헤매고 있었다.

6명이 입원하는 병실의 바닥에는 피 묻은 군복을 그대로 입은 채 국군 환자가 30 여 명이나 누워서 신음하기도 했다. 학살은 바로 시작되었다. 총 지휘는 북한군 중좌 놈이 했다. 어떻게 보아도 이 학살은 전투 중에 발생했던 우발적 학살이 아니라 어떤 무자비한 인간의 지시에 따라 체계적으로 진행된 기획 학살이었다. 월북했던 의사가 북한군 군의관이 되어 따발총을 매고 나타난 자를 비롯해서 서울대 병원에 잠복해 있던 너덧 명의 좌익 부역자들이 학살에 나선 북한군을 따라 다니며 학살할 대상에 대한 세세한 정보를 고자질했다.

병동의 출입구를 모두 봉쇄한 북한군은 병실마다 찾아다니며 따발총을 난사해서 국군 환자들을 학살했다. 국군 부상병과 구분이 안가는 일반 환자들도 같이 학살했다.

환자 중에 권총을 가진 간부급들은 병실에 난입한 북한군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전사하기도 하고 자결하기도 했었다. 이렇게 운신을 못하는 항거불능의 환자에게 총창(총검의 북한군 용어) 짓을 한 북한군의 악마적 심사가 불가사의하다.

환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죽이던 이들은 곧 더 생산적인 살인 방법을 동원했다. 침대마다 찾아다니는 대신 환자들을 입원실 구석에 몰아넣고 사살해 버렸다. 더 쉽고 빠르게 살해할 수가 있었다. 따발총 부대 살인조에는 긴 총창(총검의 북한군 용어)이 달린 모시 나간트 소총을 가진 놈이 한 명씩 있어서 총을 맞고 아직 죽지 아니한 국군들의 가슴이나 목을 찔러서 확인 살인을 했다. 국군 부상병들만 죽인 것이 아니었다.

서울대 병원에는 정신 병동이 있었다. 이들은 정신 분열증의 중증 환자가 아니라 강박증이나 환청 등 가벼운 심리 장애 증세를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북한군은 이들도 그대로 놔두지 않았는데, 이곳의 살해는 특히 잔인했다. 모두 총창으로 살해해버린 것이다. 도주할 곳이 없었던 이들은 창문에 매달려 숨어 보려고 했지만 북한군은 이들을 총창으로 내리찍어 땅바닥으로 떨어뜨려 죽였다. 다른 병실에서 총성이 들리고 학살이 시작된 것을 알아챈 국군 부상병들은 몸을 억지로 움직여 탈출을 시도했지만 병동의 앞을 지키는 북한군에게 모두 사살 당했다.

그래도 요행히 병동을 탈출한 국군은 병원을 벗어나고자 이리 저리 뛰어다니고, 북한군이 그 뒤를 쫓으며 총을 쏘거나 총창을 휘둘러 죽이는 행위가 병원 뜰에서 피비린내 나게 발생했다. 중상을 입고 움직이지 못하는 국군 장병 중에는 혀를 깨물고 자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약 세 시간 동안 광란의 살인극이 펼쳐졌는데도 아직 죽이지 못한 국군 환자들이 많다고 생각한 북한군은 다시 살상 극을 펼쳤다.

오후에는 각 병실과 건물을 다시 뒤져 아직도 생존한 국군들을 찾아내서 치과 대학 앞에 집합시켰다. 집합한 국군환자들에게 따발총의 엄청난 화력이 퍼부어졌고 다 쓰러진 시체 더미를 헤치며 숨이 붙은 환자들에게 총창의 세례가 가해졌다. 이때도 국군으로 의심되는 환자나 방문 가족까지 생죽음을 당했다. 그렇게 죽이고도 아직도 부족하다고 느낀 북한군은 오후 늦게 또 다시 정밀 수색으로 거동 수상자를 색출해내서 병원 보일러 실 석탄 더미에 이들을 생매장했다.

천인공노할 살인 행위가 휩쓸고 지나간 뒤에 살인의 붉은 피가 청소되기도 전에 북한군 환자들이 소 달구지와 민간차량 등에 운반되어 들어와 국군이 누웠던 침대에 누웠고 강제 동원했거나 부역하는 좌익 의사들이 근무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에는 북한군에 부역하는 좌익 병원 근무자들이 시체들을 치울 생각은 안하고 병원 본관 앞에서 으쌰으쌰 하면서 단합대회를 하기도 하였다.

당시 학살 당한 국군의 숫자는 정확하지 않다.

100명설에서 1,000명설까지 있는데 병동마다 국군 부상병들로 콩 나물 시루 같이 넘쳐흘렀다는 설로 보아 전자보다 후자 쪽에 더 가깝지 않나 싶다. 그리고 1970년대에 아직 기억이 생생했던 여러 관계자들을 만나 인터뷰했던 송효순 선생이 1,000명설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아 후자가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더운 여름 날씨에 사체들은 곧 부패하기 시작했다. 근처 거주 주민들은 더운 여름 날씨에도 문을 닫고 살아야 했다. 병원 앞을 지나다니던 행인들은 숨이 막히는 공포의 냄새에 코를 막고 뛰어서 지나가야 했다. 시체들을 20여 일동안 방치하던 북한군은 자기들도 버티기가 힘들었던지 사체들을 모두 끌어 모아 하필이면 병원 앞대로 창경원 앞과 원남동 로타리에서 화장했다.

국군 사체의 타는 냄새가 부패한 냄새를 대신해서 주민들을 소름 끼치는 공포로 몰아넣었다 서울대에서의 북한군의 만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9.28 수복 전 자신들에게 비협조 했거나 불순분자로 분류된 100명을 또 대학병원 구내에서 학살했다. 한국의 대표적 병원인 서울대 병원은 사람의 양식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잔악한 학살의 도살장으로 돌변해 버렸다. 이 잔인한 학살이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는 문턱, 즉 당일에 자행되었다는 사실에 유의하자. 새 점령지, 특히 적 수도를 점령하면 민심 획득을 위한 인심을 쓰는 우호책을 실행하는 것이 전쟁 역사의 전통 방식이었는데 북한군은 상상을 초월하는 천인 공로할 만행을 저질렀다.

끝맺음

지난 세기 중반에 발발한 6.25전쟁처럼 인류역사상 한 공간에서 전 국민과 25개국의 200만 명에 가까운 군인이 아주 치열하게 치른 전쟁도 흔하지 않다. 당시 독립국가 93개국 중 63개국이 남한에 병력이나 군수 물자를 제공했다. UN을 통하여 대한민국을 지원해준 나라들은, 16개 참전국을 비롯하여 의료지원국 5개국, 물자지원국 39개국, 그리고 물자지원 의사를 표명한 3개국, 총 63개국이다.

당시 대한민국은 전쟁의 폐허와 절망의 끝자락에서 하나님의 은혜로만 일어선 축복의 나라이다. 세계의 여러 나라로부터 원조를 받으며 전쟁을 치렀었으나 이제는 다른 나라를 원조해 줄 수 있는 나라로 성장했다.

자유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 Freedom is not fre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