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 기획특집

[기획특집] 8.15 광복 제73주년을 맞으며

제2차 세계대전 第二次世界大戰, Second World War은
1939년 9월 1일부터 1945년 9월 2일까지 치러진,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남긴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었다.

 

1. 제2차 세계대전(大戰)의 종결(終結)

제2차 세계대전 第二次世界大戰, Second World War은 1939년 9월 1일부터 1945년 9월 2일까지 치러진,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남긴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었다.

통상적으로 전쟁이 시작된 때는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5분 아돌프 히틀러가 다스리는 나치 독일군이 폴란드의 서쪽 국경을 침공하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군(CCCP, USSR)이 1939년 9월 17일 폴란드의 동쪽 국경을 침공한 때로 본다. 그러나 또 다른 편에서는 1937년 7월 7일 일본 제국의 중화민국 침략, 1939년 3월 나치 독일군의 프라하 진주 등을 개전일로 보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은 1945년 8월 6일과 8월 9일,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시에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사실상 끝이 났으며, 일본 제국이 항복 문서에 서명한 9월 2일에야 공식적으로 끝난 것으로 본다. 이 결과로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식민지로 남아 있던 지역들이 독립하거나 모국으로 복귀하고, 그 외에도 여러 제국들의 식민지가 독립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사자는 약 2,500만 명이고, 민간인 희생자도 약 3천만 명에 달했다. 전쟁 기간 중 일본 제국은 1937년 중국 침략 때 난징(南京) 등에서 대학살을 감행하여 겁탈과 방화를 일삼으며 수십만 명의 난징 시민을 무자비하게 살해하였고, 포로 학살 등 여러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또한 나치 독일은 ‘인종 청소’라는 이유로 수백만 명 이상의 유대인과 집시를 학살하였다. 미국은 1945년 3월 10일 일본의 수도 도쿄(東京)와 그 주변 수도권 일대를 소이탄을 사용해 대규모로 폭격한 이른바 ‘도쿄 대공습’을 감행해 민간인 15만 명을 살상했고, 같은 해 8월 6일과 9일에 각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原子爆彈 공격을 감행하여 약 34만 명을 살상하였고, 영국 공군과 미국 육군항공대는 드레스덴 폭격과 뮌헨 공습을 감행하여 각각 20여만 명을 살상하는 등, 전쟁과는 상관없는 민간인들의 피해도 매우 심했었다.

전쟁은 크게 서부 유럽 전선, 동부 유럽 전선과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외에도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중동, 대서양 해역과 인도양 해역 등 기타 하위 전선도 2차 대전의 전역에 포함된다.

2. 연합국(聯合國)의 대 일본(對 日本) 전쟁(戰爭)의 종결(終結)

하와이 진주만에서의 1941년 12월7일(일요일)새벽에 일어난 일본 제국 해군이 저지른 ‘진주만 기습작전’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콧대 높은 미국 해군을 박살 낸 쾌거였었다고 일본 군인들은 자랑하며, 앞으로 태평양상에서의 모든 이익을 독차지할 것이라 호언장담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대일본제국’의 빛나는 해상작전이었다.

중국대륙을 장중에 쥔 일본군은 남태평양을 석권하면서 필리핀에 있던 맥아더 장군을 호주로 내쫓아버렸고,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을 부르짖으며 인도지나印度支那 일대를 석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미국 해군은 1942년 6월에 침략군의 위세를 꺾고자 하여, 미드웨이 해전에서, 진주만의 악몽을 씻을 수 있는 전과를 올리게 된다. 정규 항공모함 5척과 경 항공모함 2척, 수상기모함 2척 및 전함 11척, 중重 및 경輕 순양함 계22척, 구축함 65척, 잠수함 22척 그리고 함재기(함재기)들 총 264기機의 막강한 세력을 보유하면서도 패배하고 말았다.

1944년 10월 맥아더 장군은, 필리핀의 레이테 만 전투에서 승리함으로 쫓겨났던 호주로부터 필리핀으로 귀환할 수 있었는데, 이는 미 해군과 호주 해군의 연합작전이 성공한 결과였었다. 일본은 이 전투에서 처음으로 가미카제神風특공대 돌격작전을 시행하였으며, 26척의 수상함을 잃는 패전을 겪어야만 하였다.

미군은 점차 승세를 몰아 북으로 진격을 하면서 일본 본토에 다가오고 있었는데, 1945년 3월 유황도硫黃島 전투에서는 일본군의 피해율은 무려 96%, 20,933명 중 20,129명으로 일본군 거의 모두가 전사한 소위 ‘옥쇄’玉碎작전이었다.

미군 역시 전사자 6,821명, 부상자 21,865명으로 집계되었다. 미국은 1945년 8월 6일과 8월 9일 양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原子爆彈을 투하하였으며, 일왕日王은 8월 15일 정오에 방송을 통해 무조건 항복無條件 降服을 선언함으로써, 소위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 -世界 第2次 大戰-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고, 

우리 한민족(당시는 조선민족이라 불렀지만)은 36년간이라는 일제日帝의 압박과 통치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는 나라에서 살 수 있다고 믿어 기쁨의 백성으로 변하게 되었다.

 

▲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선포식

  3.  8.15 광복

그날이 오면 / 심 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고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
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 백범 김구 선생의 글

나는 이 소식을 들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몇 년을 애써서 참전을 준비했다. 산동 반도에 미국의 잠수함을 배치하여 서안훈련소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청년들을 조직적, 계획적으로 각종 비밀무기와 무전기를 휴대시켜 본국으로 침투케 할 계획이었다.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하여 인심을 선동하며, 무전으로 통지하여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해서 사용하기로 미국육군성과 긴밀한 합작을 이루었는데, 한 번도 실시하지 못하고 왜적이 항복한 것이다. 이제껏 해온 노력이 아깝고 앞일에 걱정이었다.

– 백범 김구(金九) 선생이
일본의 항복 당시 상황을 술회하며 쓴 글 중에서-

4. ‘8.15’를 중심한 역사적 사건들

가. 1945년 8월 7일

1945년 8월 7일 오후 4시 30분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宮. 일본의 히로시마에 신형폭탄 원폭이 투하됐다는 소식을 들은 소련 스탈린은 일본에 대한 공격명령에 서명을 했다.

1945년 8월 8일 : 소련 대일본對日本 선전포고宣戰布告! 그는 부하들에게 힘주어 말했다. “전쟁의 열매는 힘으로 따지 않으면 확실히 맛볼 수 없다”이틀이 지난 8월 9일 새벽 0시. 소만국경蘇滿國境에 진주해 있던 소련군이 일제히 국경을 넘어 만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 작전에는 소련군 157만 명과 화포. 박격포 2만 6,137문, 전차와 자주포 5,566량, 군용기 3,721대를 동원했다.

소련군의 진격은 만주에 그치지 않고 이틀 후에는 한반도 북단 동해안의 경흥, 함흥까지 밀고 내려왔다. 사할린 남부에도 소련 육군과 해군, 해병대가 국경선을 넘어 일본군을 공격했다. 소련군의 기습에 놀란 것은 공격을 당한 일본만이 아니었다.

원폭을 투하한 뒤 일본의 항복 소식만 기다리던 미국도 당황했고, 만주를 포함한 중국 전체를 통일하려던 장개석도 충격을 받았다. 다만 연안에서 일본군이 철수하면 장개석 정부와 일전을 벌이려던 모택동毛澤東과 소련군에 편입되어 한반도 진입을 준비하던 김일성(본명 金聖柱)의 88여단旅團만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소련군은 만주를 북중국에서 고립시키고 한반도로 향하는 통로를 만들어 나갔다. 8월 15일 일왕日王이 항복 선언을 했으나 소련군과 관동군關東軍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동부국경에 있던 후토우 요새에서 민간인을 포함한 1,900명이 옥쇄로 모두 죽은 26일에야 만주에서의 전투가 종식되었다.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은 제일 먼저 관동군의 수뇌부와‘푸이 황제’를 비롯한 일본의 괴뢰국傀儡國 만주국滿州國의 황족과 수뇌부를 연행해 전범재판戰犯裁判에 넘기면서 시베리아로 끌고 갔다. 이어 전리품戰利品이 된 공장 등 산업시설을 뜯어내 기차에 싣고 소련으로 가져갔다.

포로로 잡힌 관동군 60만 명은 노동력으로 활용하기 위해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이 와중에 군기가 풀린 소련군은 도처에서 약탈과 폭행, 강간을 일삼았다. 소련군의 군정軍政이 실시되자 중국 공산당은 그 기회를 틈타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스탈린이 낮게 평가했던 모택동의 홍군紅軍이 소련군의 점령이라는 특이한 정치공간을 이용해 저변을 넓혀 나간 것이다. 일본이 패망한 후 만주에는 조선인이 110만 명이나 남아 있었다. 본군이 떠나자 만주 각 지역에서 중국인에 의한 조선인 박해사건이 잇따랐다. 특히 조선인 비율이 낮은 마을이 괴뢰 만주국의 패잔병이나 마적들의 집중적인 공격대상이 되었다.

상황이 악화되자 조선인들은 생존을 위해 주거지를 버리고 하얼빈, 목단강, 가목사, 연길, 길림 등 좌익계열의 독립군인 항일연군抗日聯軍이 장악하고 있는 도시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반국민당, 친공산당’으로 기울어 중공군中共軍, 前 八路軍에 대거 입대入隊한다.

1.1945년 8월 6일 피폭 후 히로시마 거리   2. 모택동과 스탈린   3. 싱가포르에서 영국군의 포로가 된 철창속의 일본군 장교들 – 1945년 8월   4. 일본천황의 항복선언 (1945년 8월15일 라디오 방송)

나. 8월 11일, 소련군대 북한으로 진격, 소비에트화 준비 착수

소련은 6개월 전 ‘얄타회담’에서 미국과 체결한 결의에 근거해 8월 8일 ‘선전포 고’와 동시에 대일전(對日戰)을 개시했다. 그리고 미국으로부터 무기와 장비를 지원받아 157만 명의 대군을 소·만 국경을 넘어 중국의 동북지역과 한반도로 진격시켰다. 소련군의 북한 진입은 8월 15일과 17일 사이에 급속히 이루어졌다.

소련 공군기는 함경도 웅진, 나진, 청진 등지에 폭격을 개시했고, 치스챠코프 대장이 이끄는 소련 극동방면군 소속의 제25군이 동해 해상을 통해 청진, 흥남, 함흥, 원산 등지를 거쳐 24일에는 평양으로 진입했다. 소련은 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북한 임시정부 수립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소련 군정과의 긴밀한 협의를 거쳐 소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위원장 김일성, 전 소련군 대위)는 1946년 3월 토지개혁, 11월 3일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 등을 발 빠르게 추진해 나갔다.

-그 이후-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 수립에 이어 1948년 2월 ‘인민군 창건’단계에 이르면서 북한 지역에는 사실상 행정부와 군 조직이 완성되었고, 무력으로 통일 하고자 하는 준비가 착착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다. 8월 13일, ‘분계선’이 ‘39도선’이 아니라 ‘8도선’으로 선정. -‘運命의 1度’

1945년 8월 11일 미국의 국무부· 해군부· 육군부 3부 조정위원회(SWNCC)는 그동안의 미 육군부 제안들을 바탕으로 38선 이북은 소련군이, 이남은 미군이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도록 하는 ‘38선 분할초안’을 기안했다. 38선 분할 안이 최종 결정되기 전인 8월 12일에 이미 웅기· 나진 등에 진주한 소련도, 미국이 제안한 이 조항을 반대 없이 받아들였다.

이어 태평양 방면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1945년 8월 15일 발표한 ‘일반명령 제1호’에서 “38도선 이북의 일본군의 항복은 소련이, 이남 일본군의 항복은 미군이 접수한다.”고 선언하여 38선이 공식 기정사실화되었다. 트루먼은 38선 분할 안案에 대해 “한국에서 힘의 공백이 생겼을 때 실질적 해결책으로 우리들에 의해 제안된 것”이라고 회고했다. 38선 확정은 별도의 미·소 간 비밀협약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미· 소 간 항복접수 구획선으로 제안된 미 육군부의 건의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군사작전의 구획설정을 위해 편의적으로 그어진 작전구획선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38선은 전후 한반도에 단일세력 진입을 막기 위한 신탁통치안, 제2차 세계대전중 군사점령과 항복접수를 일국에 맡길 수 없다는 구획선 안 등 전후처리 과정에 줄곧 내재된 미·소의 국제정치적 흥정과 이익이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로우니 장군의 저서 ‘운명의 1도’

에드워드 L. 로우니 장군의 증언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공식 항복일(1945년 9월 2일) 직전 링컨 장군의 상관인 조지 마셜 장군은 남북 분단선 설정 안을 건의토록 지시했다. 회의에서 딘 러스크 대령은 한반도에서 가장 폭이 좁은 곳이어서 군사분계선 방어에 많은 병력이 필요치 않다는 이유로 평양 바로 아래쪽 39도선에 긋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링컨 장군은 예일대 지리학과 교수인 스파이크만이 1944년 저술한 ‘평화의 지리학’을 인용하면서 38도 선을 지목했다.

스파이크만은 38도선 북쪽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학설을 제기한 인물이다. 상황을 지켜본 로우니 장군은 ‘운명의 1도’에서, “돌이켜 보면 잘못한 일” 이라며 “39도선 방어가 훨씬 쉬웠을 뿐 아니라 많은 미군 생명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리챠드 알렌, 전 미국 백악관 안보보좌관 증언

“실수는, 아시아에서 미래를 결정하는데 소련에게 동등한 지위를 준 것입니다. 특히 한국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소련은 단지 6일 동안 극동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스탈린이 한 일은 그게 다였지만 북한에 손을 뻗었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독일처럼 38선에 의해 나라가 분리됐습니다.” 북위 38도선이라는 낯선 경계는 일반명령 1호에서 처음 그 존재를 드러냈다.

▲ 미국-일본 항복 조인
▲1945년 8월 15일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해방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라. 8월 15일, 日王 무조건 항복(無條件 降服)

일본의 항복( Surrender of Japan)은 일본이 1945년 8월 14일에 연합국에 통보하였고, 8월 15일 낮 12시에 일왕日王 쇼와昭和 천황天皇이 항복 선언을 한 것을 말한다. 9월 2일에는 일본의 도쿄(東京)만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 USS 미주리 (BB-63) 함상에서 일본 대표가 정식으로 항복문서에 서명을 하였다. 이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종결되었다.

日王의 항복선언 안 믿어…
8월 15일 당일, 서울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항복조항 내용대로 형무소에 있었던 죄수가 풀려나고서야 인정되기 시작했다.

그 때서야 경성(서울) 시민들은 어제 방송이 일왕의 항복방송인 줄 알게 되었고, 해방, 광복을 환호하기 시작했다.
일본군 대본영日本軍 大本營은 미국의 지시대로 항복 절차와 방법을 명시해 각 지역에 있는 일본군에게 하달했다. 두 점령군을 위한 경계선. 38선은 이렇게 처음 한반도에 나타났다. 1945년 8월 15일.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1주일 만에 일왕日王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항복을 선언했다.

제2차 대전의 완전한 종말. 일본의 패망으로 군국주의의 망령은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게 됐다. 한반도는 해방의 감격에 휩싸였다. 일본은 물러갔다. 다시 제 나라의 주인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토록 염원하던 자주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게 된 한반도는 희망과 희열로 넘쳐났다. 그러나 한반도에는 해방과 함께 분단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마. 8월 22일, 소련군 北韓(38도선 이북) 軍政 시작

북한으로 진출한 소련군 치스챠코프 대장은 1945년 8월 하순 평양에 군사령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북한 각지에서 현지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무장해제를 실시하면서 38도선 일대에 초소를 설치했다. 남북을 왕래하는 통행인에 대한 검문검색을 강화했고, 남북을 연결하는 주요 철도, 도로 및 통신도 차단했다.

그 후 치스챠코프는 본격적인 군정실시 기관으로 민정관리총국을 설치했다. 이 기관은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보건, 위생, 출판, 보도, 사법지도부 등 군정에 필요한 9개의 지도부가 있었으며 정치사령부의 통제를 받았다. 소련 군정당국은 원활한 군정실시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평양진입 후 초기 얼마간은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들의 명망과 조직을 이용했다.

그들은 조만식이 위원장으로 있던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를 승인해 한국인이 주권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8월 24일부터 9월 말에 걸쳐 민족주의자들이 중심이 돼 자발적으로 조직한 각지 자위대, 치안유지위원회, 건국준비위원회 지부와 좌익계열의 보안대, 적위대 등의 각종 정치 군사단체들을 흡수 통합해 도별 인민위원회를 세웠다. 각 도별 인민위원회 위원장에는 한국인을 기용했다. 그러나 고문관에는 소련군 장교들을, 실권 있는 요직에는 소련계 한인들을 앉혔다.

그러므로 이 기구는 외관상 자주적으로 운영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소련 군정당국에 지배되고 있었다. 따라서 각 도의 인민위원회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민족진영 세력이 점차 배제되면서 주로 친소적 공산주의자들에 장악됐다.

각 도별 인민위원회는 행정기관, 경찰관서, 경제기구 등 구 일본의 모든 행정기관들을 접수하고 행정권을 인수했다. 그런 후 소련 군정당국은 10월 14일 평양에서 군중대회를 열고 소련군 대위 김일성을 북한주민 앞에 내세웠다.

또 11월 18일에는 5도 인민위원회를 통괄하는 5도 행정국을 설치하고 산업, 교통, 체신, 농림, 사법, 재정, 교육, 보건, 사법, 보안등 10개국으로 된 행정체제를 정비했다. 이어서 김일성은 12월 중순 북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 선정되면서 소련군정당국의 하수인으로서 북한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했다.

소련 군정당국은 김일성 일파로 하여금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케 하고,(무상몰수 무상분배) 이를 농민들에게 분배해 주면서 일반 대중에게 공산주의에 대한 동경과 환상을 심어 주는 계급투쟁을 전개했다. 동시에 그들은 북한 내 국내파 공산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을 포섭 혹은 흡수하는 노력도 기울였다.

그 과정에서 소련 군정에 협조하는 동조자는 포섭하고, 비협조자들에 대해서는 남한탈출을 묵인하거나, 혹은 구금하는 방법으로 숙청작업을 전개했다. 이렇게 소련 군정당국은 불과 약 4개월 만에 김일성을 정점으로 한 북한 권력체제를 형성시켜 놓았다.

▲1945년 9월 2일 도쿄, 미 미조리 함상에서 일본의 항복 승인을 서명하는 맥아더 미 극동사령관 (일본인의 ‘살아있는 신’(現神人)을 무릎 꿇린 점령군 총사령관 맥아더)
▲ 1945년 9월 2일 도쿄, 미 미조리 함상에서 일본 대표가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장면을 맥아더 미 극동사령관이 지켜보고 있다.

바. 9월 2일, 일본 항복 조인식, 東京 灣, 미주리艦上

사. 9월 9일, 미군 南韓(38도선 이남) 軍政 시작

1945년 9월 9일 오후 4시, 조선 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총독이 미 제24군단의 ‘존 하지’ 중장과 제7함대 사령관 ‘킨케이드’ 제독 등 미군 장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서명을 했다. 이미 1주일 전 동경 만에 정박한 미주리 함상에서 공식적인 항복 조인식이 있었지만, 이날 항복문서의 효력은 38선 이남에만 적용된다는 것이 달랐다.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은 바로 전날인 9월 8일 인천을 통해 한반도에 상륙했던 터였다. 잠시 후, 총독부 앞뜰에서는 8월 15일 일왕의 항복 선언 뒤에도 23일간이나 게양되어 있던 일장기(日章旗)가 내려지고 성조기(星條旗)가 올라갔다.

한반도의 통치권이 일본 제국주의의 총독부에서 미군정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일본인들의 한국 식민정책 최종 총독, 아베 노부유끼阿部信行는 1944년 제 10대 마지막 조선 총독으로 취임하여 한국에서 전쟁 물자를 지원하기 위해 인력과 물자를 일본으로 착취해 갔다.

조선총독으로 부임 후 전쟁수행을 위한 물적 · 인적 자원 수탈에 총력을 기울였다. 징병·징용 및 근로보국대의 기피자를 마구잡이로 색출했으며, 심지어는 여자 정신대 근무령을 공포해 만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여성에게 정신 근무령서를 발부했고, 이에 불응 시는 국가 총동원법에 의해 징역형을 내리기도 했다. 아베 노부유끼는 미국이 우리나라에 들어오자 총독부에서 마지막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대한민국을 떠나면서 그때 남긴 아베 총독의 기막힌 말 :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민이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 사람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일제日帝는 강점기强占期 중 식민정책植民政策: ‘징병徵兵’과 ‘징용徵用’, 창씨개명創氏改名등 악정惡政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일제 말엽,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정국政局은 종국終局으로 치닫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강제로 징병과 징용으로 잡혀 나가야 했다.

징병으로 간 사람들은 만주와 남양군도南洋群島 등으로 끌려갔다. 만주로 간 사람들은 장개석 군대로 도망쳤으며, 혹은 잘못되어 우리 독립군과 싸우는 기구한 운명에 부닥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남양군도南洋群島로 간 사람들은 미군과 싸웠다. 극도로 열악한 보급으로 연명할 뿐…., 아사 직전의 형태에서 싸웠던 것 같다.
(강제징병 약 21만 명, 지원병 형식 43만여 명, 여자정신대 약 20만 명, 소계 84만여 명,)징용은 군인이 아니라 노무자로 끌려가는 것이며, 각 전쟁용품을 생산하는 기업체, 광산 노무자, 군속軍屬; 군대에서 군을 보조하는 노무자)등으로 징집되어 갔다. 징용자들도 보급품이 열악해 겨우 생명을 연명하는 정도에서 극도의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강제노력 동원은 주로 해외 탄광, 군수공장, 전선노역 등 150만 명 이상으로 추산)

창씨개명創氏改名:1938경부터···

동서고금을 다 털어 봐도 이런 처사는 우리나라가 처음 당하는 일이었다. 악랄한 일본日本은 한국 민족을 근본적으로, 뿌리부터 없애려는 계책으로 우리의 뿌리인 성姓을 없애고 우리식의 이름마저 자기들 일본식 방식으로 강제변경하였다.

물자 수탈物資收奪및 신사참배神社參拜 강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이르자 우리들 가정에 있는 모든 쇠붙이, 놋그릇 할 것 없이 수탈해 갔고, 초등학교 학생부터 민간인들까지 마초馬草받치기, 비행장 및 도로 건설 노력동원 등 온갖 착취를 당하였다.

조선총독부 朝鮮總督府, 국기國旗 게양대에 일장기日章旗, 성조기星條旗 그리고 태극기太極旗

1910년 강제로 추진한 ‘한일합방’이래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은 일본의 국기 ‘일장기日章旗’는 당연히 1945년 8월 15일 찢기어 내려졌어야 했거늘, 미국 군대가 일본군이 항복을 하고, 무장해제를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기가 막히는 시간이 흘러갔다.

1945년 9월 9일, 미군은 일본의 ‘조선총독’으로부터 정식으로 항복을 받았으며, 이에 따라 일장기日章旗는 하강했으며, 태극기太極旗대신 미국의 국기인 성조기星條旗가 걸렸다.

글을 마치며···

올해로 우리 민족이 해방 된지 73주년이 되는 해이다. 사실, 우리 힘으로는 일제의 억압과 수탈 속에서 광복의 기쁨을 맞이하기란 역부족이었다. 만약 해방이 되지 않았다면 우리민족의 상황은 지금 어땠을까 하는, 만약이라는 경우의 수도 생각해보곤 한다. 우리 민족의 찬란한 문화, 언어, 이름, 고유한 전통들은 다 말살 되고 사라졌을 것이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광복절이다. 하나님께서는 1945년 8월 15일 우리에게 광복을 허락하셨다. 일제로부터의 광복이지만, 또한 이 민족이 지은 죄가로부터 회개시키기 위한 광복이었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을 사랑하셔서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일제치하에서 고통하게 하시고, 회개토록 하시기 위해서 이 백성에게 살길을 열어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살고 있다. 목사들 이 오히려 나서서 교회를 무당과 귀신, 강도의 굴혈로 만들고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교회 안에는 무속신앙인들과 미신이 가득하다. 광복 이후 우리 한국교회는 회개는커녕 더 많은 죄를 범하고 있다. 1950년 6.25동란이라는 채찍을 드셨음에도, 그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지금 기독교는 맘몬의 사상에 사로잡혀 잊어버리고 있다. 생각을 하고 싶지도 아니한가 보다.

중세기 로마 교황청은 물질적으로 풍요했다. 그러나 실상은 아무것도 베풀 것이 없는 가장 가난한 집단이었다. 작금의 한국교회가 그렇다. 밖에는 관심이 없다. 마치 국가 기관들이 년말이 되면 국민의 삶이야 어찌 되던, 자기네가 몸담고 있는 기관들이 수십, 수백억씩 손실이 나도 나랏돈으로 자기들끼리 물 쓰듯 자화자찬하며 성과급 잔치하듯이 작금의 한국교회는 넘쳐나는 헌금으로 자기도취에 빠져있는 교회들이 비일비재하다. 그 풍요의 그늘의 한켠에는 배를 움켜쥐고 교회 월세, 생활비, 자녀 교육비 등으로 쥐엄 열매를 먹고 살아야 될 정도로 피폐해진 종들이 얼마나 많은가.

더는 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이 땅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다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광복의 의미이다.


■ 편집부